[일사일언] 헌 신발을 바라보며

이진준 뉴미디어 아티스트·KAIST 교수 2022. 8. 16.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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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신발이 배달됐다. 헌 운동화를 버릴까 해서 살펴보니 오른쪽 밑창만 유독 닳았다. 왼쪽 다리를 다친 후 이렇게 오른쪽 다리가 고생한다. 신발을 버리려다 왠지 멈추게 된다. 불편한 한쪽을 대신해 두 배로 애를 써준 다리와 신발에 고맙고 미안해진다.

몇 해 전 작업하다가 다리 힘줄이 끊어지는 사고를 겪었다. 급하게 수술을 받고 6개월가량 휠체어 신세를 졌다. 나중에 목발이 익숙해지고 차츰 땅에 발을 붙일 때 즈음, 빈약해진 왼쪽 허벅지와 종아리를 보며 과연 다시 제대로 걸을 수 있을까 걱정할 정도로 심각했다. 병원에 입원했을 때 창문 밖을 내려다보며 걸어가는 사람들을 부러운 마음으로 하염없이 바라보곤 했다.

영국 출신 예술가 리처드 롱은 걷기를 작품으로 승화한 작가다. 돌, 나뭇가지 등으로 자신이 지나간 흔적을 자연에 남김으로써 걷기라는 구도 행위와 인간과 자연의 조화로운 관계를 명상하게 한다. 걷는다는 것은 직립보행하는 인간에겐 ‘살아있음’을 상징하는 것과 같다.

걷는다는 행위로 살아있음을 표현하는 존재론적 지각은 자코메티의 조각에서도 보인다. 자코메티는 뼈만 남은 인간이 앙상한 몸덩이를 부여잡고 커다란 한 발자국을 내딛는 모습을 표현했다. 고뇌에 찬 오랜 사색의 결과 남은 것은 그래도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결연한 의지의 표현이다.

작업이 잘 안 풀리거나 심적 갈등이 생길 때면 어김없이 밖으로 나가 걷는다. 비가 와도 좋고 햇볕이 내리쬐어도 좋다. 한동안 말없이 그렇게 걷다 보면 어느 순간 나 자신과 대화하는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결국 모든 것은 다 지나간다고 스스로 다독인다.

일본 교토와 독일 하이델베르크엔 ‘철학자의 길’이 있다. 철학자가 걸어서 유명해진 길이지만 그 길이야말로 사색하게 하는 힘을 지녔다는 뜻이기도 하다. 바로 그 길이 철학자를 만들어 낸 것이다.

고흐의 신발 그림을 보며 신발 주인의 고뇌와 노동의 흔적을 읽어내듯이 내가 남기게 될 신발은 내 사색의 깊이를 보여줄 것만 같다. 새로운 신발을 샀으니 또다시 걸어야겠다.

이진준 뉴미디어 아티스트(KAIST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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