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 비핵화 협상 나오면 초기부터 경제지원

정영교, 왕준열 입력 2022. 8. 16. 00:23 수정 2022. 8. 16.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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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이 15일 광복절 77주년 경축사에서 “북한이 핵 개발을 중단하고 실질적인 비핵화로 전환한다면 그 단계에 맞춰 북한의 경제와 민생을 획기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담대한 구상’을 지금 이 자리에서 제안한다”고 밝혔다.

윤 대통령은 이날 구체적으로 “▶대규모 식량 공급 프로그램 ▶발전과 송배전 인프라 지원 ▶국제 교역을 위한 항만과 공항 현대화 프로젝트 ▶농업 생산성 제고를 위한 기술 지원 프로그램 ▶병원과 의료 인프라 현대화 지원 ▶국제투자 및 금융 지원 프로그램을 실시하겠다”고 말했다. 취임 100일을 앞두고 지난 5월 취임사에서 밝힌 ‘담대한 구상’의 윤곽을 처음 공개한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15일 용산 대통령실 청사 잔디마당에서 열린 제77주년 광복절 경축식에서 경축사를 하고 있다. 윤 대통령은 이날 약 13분간의 경축사에서 ‘자유’를 총 33회 언급하며, ‘자유’가 윤 정부의 핵심 가치임을 재천명했다. ‘담대한 대북 구상’ 윤곽도 처음 공개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이와 관련, 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은 이날 브리핑에서 구체적인 내용을 설명했다. 김 차장은 “북한이 진정성을 갖고 비핵화 협상에 나올 경우 초기 협상 과정에서부터 경제지원 조치를 적극 강구하겠다는 점에서 과감한 제안”이라고 밝혔다. ‘담대한 구상’이 북한의 비핵화 조치에 대한 상응 조치가 아니라 비핵화 협상과 동시에 가동된다는 것은 윤 정부가 대선 기간 등에 밝힌 ‘선(先)비핵화’ 기조와 비교할 때 상당히 전향적이다.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는 나아가 “필요시 유엔 대북제재 결의안의 부분적인 면제도 국제사회와 논의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향후 추진할 대표적인 대북 경제지원 방안 중 하나로 북한의 광물, 모래, 희토류 등 지하자원과 한국의 대규모 식량 공급 프로그램을 연계하는 ‘한반도자원식량교환 프로그램(R-FEP·Resources-Food Exchange Program)’을 소개하면서다. 그간 윤 정부는 대북제재의 철저한 이행을 강조해 왔다.

그는 “4개의 유엔 안보리 결의안이 북한 광물을 외부에 반출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며 “미국·유엔과 대북 인도적 지원을 논의하면서 식량과 자원을 서로 교환할 수 있는 전향적 조치를 비핵화 협상 과정에서 논의할 수 있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2019년 결렬된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당시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영변 핵시설 폐기 대가로 유엔 안보리의 5개 대북제재를 해제해 달라고 요구했다. 북한의 최대 관심사를 비핵화 협상 카드에 반영한 것이다. 이 관계자는 “과거 협상은 동결-신고-사찰-폐기 등 단계를 논의하다가 끝났는데 (‘담대한 구상’은) 포괄적 합의가 진행되는 과정에서도 어떤 제재를 부분적으로 해제할지를 이야기하겠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 대통령실은 미국과의 사전 협의도 이뤄졌음을 공개했다. 이 고위 관계자는 “우리 플랜을 구체화하는 과정에서 진전 사항을 그때그때 미 측에 브리핑했다”고 밝혔다.

남북협상 시작과 동시에 ‘북한 광물-한국 식량’ 교환 논의

북한은 2008년 6월 비핵화 의지를 밝히기 위해 영변 원자로의 냉각탑을 폭파시켰다. [연합뉴스]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는 “미국도 관심을 갖고 있으며, 미 행정부도 제대로 비핵화 협의 과정이 된다면 엄격한 안보리 제재 조치에 대해 당사국(북한)과 마음을 열고 논의할 생각이 있다”고 소개했다. “한반도 평화 구축을 위해선 당사국끼리 (대북제재의) 예외조항으로 해달라고 협의하면 가능하다”고도 했다.

정대진 원주 한라대 교수는 “이번 제안으로 북한을 다시 협상 테이블로 이끌 수 있는 최소한의 동력은 마련된 것으로 보인다”면서도 “다만 대규모 한·미 연합훈련이 예정된 상황은 ‘담대한 구상’ 추진에 장애 요인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는 또 윤 대통령이 밝힌 ‘담대한 구상’에 대북 경제지원 외에 “정치·군사 부문의 협력 로드맵도 전부 마련해 뒀다”고 강조했다. 윤 대통령의 이날 경축사엔 그간 북한이 요구해 온 ‘체제 안전’을 보장하는 정치·군사 분야의 제안은 포함되지 않았다.

그는 “‘담대한 구상’의 비전은 결국 경제·군사·정치 세 가지 분야에서 남북이 협력을 논의하고 실천·심화하는 과정에서 비핵화도 동시에 합의·실천되는 것”이라며 “군사 분야에서는 긴장 완화에서 신뢰 구축 단계로, 정치 분야에서는 평화 구축에서 평화 정착 단계로 마무리돼야 한다”고 설명했다. 북한은 그간 자신들의 체제 안전을 위해 정치 분야에선 연락사무소 설치 및 수교 등 북·미 외교관계 정상화, 군사 분야에선 한·미 군사훈련 중단, 미군의 확장억제 제공 중단, 주한미군 철수 등을 요구해 왔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차두현 아산정책연구원 선임연구원은 “‘체제 안전’이라는 가장 중요한 조건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없어 북한 입장에서 ‘담대한 구상’을 수용할 유인이 부족하다”며 “북한의 호응을 끌어내려면 남북 경제협력을 통해 북한 경제가 발전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비핵화를 결단하더라도 체제 안전이 흔들리지 않는다는 걸 설명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대통령실이 그간 거부감을 밝혀온 이명박 정부의 ‘비핵·개방·3000’(비핵화 및 개방 시 북한 1인당 국민소득을 3000달러로 끌어올리기 위한 경제지원)과의 차별점도 강조한 대목이 눈길을 끈다. 북한은 지난 7일 대외용 주간지 통일신보를 통해 “이명박 역도의 ‘비핵·개방·3000’을 적당히 손질한 것”이라고 하는 등 대선 기간 및 이후 언급된 윤 정부의 대북정책을 강하게 비판해 왔다.

이 고위 관계자는 “우리는 대폭 바꿨다고 말할 수 있다”며 “‘비핵·개방·3000’은 비핵화 합의가 나왔다는 걸 전제로 경제 협력을 하는 것이고, 거기에 없었던 정치·군사 협력 방안을 로드맵에 넣었다”고 설명했다.

정영태 동양대 석좌교수는 “과거 ‘비핵·개방·3000’이 원론을 제시한 것에 비해 ‘담대한 구상’에선 비핵화 과정에서 북한이 수용 가능한 로드맵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보다 현실성을 갖췄다”고 평가했다. 위성락 전 주러시아대사는 “일단 전향적인 대북 제안은 긍정적”이라면서도 “김 위원장이 매우 이례적으로 지난달 윤 대통령의 실명을 거론하며 위협하는 등 대남 강경 기조가 강한 상황에서 당장 돌파구가 마련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전망했다.

정영교 기자 chung.yeonggy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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