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가 먼저 헤아렸구나, 이중섭의 손바닥만한 그리움
이건희 기증작 104점 중 80여점 골라내
미술관 소장 10점 보태 90여점 한자리
엽서·담뱃갑에 새긴 가족 향한 절절함
"내 사랑하는 아내 남덕천사 만세만세"
'부인에게 보낸 편지' 손글씨사연 애틋
[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40년 생애. 그중 가장 빛났던 5년. 그 ‘한때’에 불과한 짧은 시절을 그림 몇 점으로 가늠한다는 게 가당키나 하겠나. 찢어지는 가난 때문에, 가족과 생이별한 아픔을 어디 하소연도 못해, 그저 손바닥만한 화면에 절절하게 실어낼 수밖에 없던 어느 작가의 처지를 감히 재보겠다 하겠느냐 얘기다.
닿을 수 없는 그리움, 그 아득한 거리가 주는 비통함을 누구보다 애처로워했던 건가. 이건희(1942∼2020) 전 삼성 회장은 그 작가 ‘이중섭’(1916∼1956)의 전부였을, 짧은 생과 바꾼 작품들을 쉬지 않고 수집했던 듯하다. 지난해 4월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한 소장품 1488점 중 이중섭의 작품은 104점. 흔히 ‘돈 되는 그림’보다 애정을 기울였던 건 따로 있었다. 그 손바닥만한, 남들은 눈여겨보지도 않았을 엽서그림, 담뱃갑그림이 쏟아져 나왔으니.
국립현대미술관의 ‘이건희컬렉션 특별전: 이중섭’ 전. 서울 종로구 삼청로 서울관에 연 전시는 지난해 이 회장 유족에게 기증받은 작품 중 ‘이중섭’만을 골라 꾸린 자리다. 104점 중 80여점을 뽑아내고, 미술관이 이미 가지고 있던 10점을 보태 90여점을 걸었다. 이중섭의 비중은 기증작 중 최고다. 작품 수로만 따지자면 유영국(1916∼2002), 파블로 피카소(1881∼1944)에 이어 세 번째지만, 판화·도자기가 대다수인 두 작가에 비해 회화·드로잉이 월등히 많아서다.
90여점 모두 숨을 참고 눈을 갖다 대야 보이는 작품들이다. 알려진 대로 이중섭 작품은 작다. 그나마 기증작 중 큰 편이라고 할 ‘황소’(1950s·26.5×36.7㎝), ‘흰 소’(1950s·30.5×41.5㎝)는 이번 전시에 빠져 있는 데다(‘황소’는 국립중앙박물관 ‘어느 수집가의 초대’ 전 걸려 있고, ‘흰 소’는 미국 LA카운티미술관 한국근대미술전을 위해 외유 중이다) 한뼘 남짓한 엽서화와 은지화(각각 36점, 27점)가 63점으로 3분의 2가 넘는다. 그런데도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는지, 그이의 작품들은, 그 좁은 공간을 가득 채운 그이와 가족들은 두 팔을 벌린 채 환하게 웃고 있다. 그들뿐인가. 곁에 선 닭과 새, 물고기와 게 등도 덩달아 즐겁다.
“다시 만난다”…가족, 이중섭 작품의 시작이면서 끝
1916년 9월 16일, 이중섭은 평안남도 평원군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평양 공립종로보통학교를 다닌 뒤, 미술공부는 평안북도 정주 오산고등보통학교에서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일본으로 떠나 1936년 도쿄 교외 제국미술학교에 입학하고, 이듬해 도쿄 문화학원으로 옮겨 1941년까지 다녔다. 이중섭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라 할 아내 야마모토 마사코(한국이름 이남덕)를 만난 것도 여기 문화학원이다.
이중섭의 ‘엽서화’는 바로 그 아내 덕에 세상에 나왔다. 1940년부터 1943년까지 아내에게 줄기차게 보낸, 엽서에 그린 그림을 말하는 것이니까. 9×14㎝ 규격이 정해진 관제엽서 앞면에는 그림을, 뒷면에는 주소를 남겼는데, 모두 88점(1940년 1점, 1941년 75점, 1942점 9점, 1943년 3점)이 남아 있다. 그나마 엽서화가 전해진 것도 엽서니까 가능한 일이었다. 그 ‘작품’을 수취인인 아내가 소중히 받아 보관한 덕이다. 전시에는 그 엽서화 중 36점을 걸었다.
두 사람이 결혼식을 올린 건 1945년 5월 원산에서다. 하지만 짧았다. 그이들의 인생은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뒤흔들리고 말았으니. 어머니와 이별하고 남쪽으로 피란하며 그 이전 작업한 ‘소’(1940), ‘소묘’(1941), ‘망월’(1943) 등 작품 대부분을 원산에 두고 내려온 건 차라리 소소한 일이었다. 부산·제주도 등에서 했던 가혹한 피란생활도 견딜 만했을 거다. 가족이 함께였으니까.
생활고를 못 이겨 결국 1952년 6월 아내와 두 아들 태성·태현을 일본으로 떠나보내게 되는데. 이후 이중섭에게는 오로지 하나의 목표만 남았다. 어떻게 해서든 가족을 다시 만나겠다는. 그 의지는 고스란히 작품에 옮겨갔다. ‘가족’이란 주제와 소재가 더 자주 등장한 거다. 네 사람이 서로 손을 붙들고 춤을 추고(‘춤추는 가족’ 1950s), 배를 타고 가족을 만나러 가는 작가(‘현해탄’ 1950s) 등 마치 꿈속 같은 장면을 펼쳐내는데. 그중 한 갈래가 ‘편지화’에 실렸다. 가족과 헤어진 직후부터 1955년까지, 새와 닭, 물고기와 게, 아이들, 가족을 그리는 화가 등의 도상이 알록달록한 색을 입고 쉼 없이 전해졌다.
한 장면만 들여다보자. “화공 이중섭은 반드시 가장 사랑하는 현처 남덕 씨를 행복한 천사로 하여 드높고 아름답고 끝없이 넓게 이 세상에 돋을새김해 보이겠어요… 내 사랑하는 아내 남덕 천사 만세 만세.” ‘부인에게 보낸 편지’(1954·26.5×21㎝)라 이름 붙은 작품에는 손글씨로 쓴 사연 주위로 해·달·별 아래 화사하게 꽃다발처럼 묶어낸 가족이며, 그 풍경을 열심히 화폭에 담는 화가며, 행복한 연출이 한가득이다.
담뱃갑 은박지에 새겨야 했던 지난한 꿈
그래도 남은 그리움은 ‘은지화’에 담았다. 예전 담뱃갑에는 담배를 포장하던 은박지 같은 종이가 들어있더랬다. 이중섭은 이 반짝이는 종이를 빼내 넓적하게 누르고 늘려 그 위에 철필이나 못 등으로 새기듯 그림을 그렸다. 세계서 유일하다는 은지화는 바로 그렇게 만든 작품을 말한다. 그이가 언제부터 은지화를 그렸는지는 분명치 않다. 가족을 일본으로 떠나보낸 뒤, 쓰레기더미에서 담뱃갑을 찾을 만큼 극도의 곤궁함에 시달리면서부터일 것으로 추정만 할 뿐이다.
은지화 속 도상은 이중섭이 남긴 여느 이미지와 다르지 않다. 하지만 안쓰러운 장면은 그림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1953년 11월부터 이듬해 6월까지 머문 통영, 1954년 진주, 1955년 서울 등에선 앞서 아내에게 ‘선언’한 만큼 작업에 열심이었다. 하지만 1955년 대구 미국공보원 ‘이중섭 작품전’ 이후 급격히 심신이 쇠약해졌고, 결국 마지막 풍경에선 어느 정도 체념도 했을 그이의 외로운 붓끝이 보인다. 서울에서 그린 정릉집 주위 풍경화(‘정릉풍경’ 1956)에선 나무와 집의 쓸쓸함이 또렷해졌다. 즐겨 그리던 물고기와 아이들의 흔적이 무색할 만큼 말이다. 결국 꿈으로 그림으로 애타게 찾던 가족을 끝끝내 다시 만나지 못한 채 그이는 스러져갔다. 1956년 서울 적십자병원에서 무연고자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말이다.
‘이중섭 작품’은 타이틀이라도 확인할 수 있는 것까지 670여점. 그 일부를 꺼내놓은 전시에 다시 관람객이 몰리고 있다. 지난 12일 개막해 광복절 연휴 내내 하루평균 1600명씩 6400여명이 다녀갔단다. 시간당 200명(예약 140명, 현장 60명)이니, 작은 틈도 없이 온종일 발길이 이어졌단 얘기다. 이쯤 되면 지난 ‘이건희컬렉션 특별전’에 다녀간 25만명은 가뿐히 뛰어넘을 듯하다. 세상에는 숫자가 말해주지 못하는 게 분명히 있지만, 때론 그 숫자가 세상이 말 못하는 걸 대신 전하기도 한다. 전시는 내년 4월 23일까지.
오현주 (euanoh@e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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