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일수만 채우게 하면 '책임 끝'인가[선동열의 야구, 이야기]
최근 트래킹 데이터(투구·타구의 움직임을 추적한 기록)를 공부하면서 첨단 장비를 활용해볼 기회가 몇 번 있었다.
프로야구단이 빅데이터를 활용하고자 인프라를 구축하는 것은 새삼스럽지 않다. 그러나 사설 학원인 ‘야구 아카데미’가 비싼 장비를 구입해 활용하는 모습은 꽤 놀라웠다.
야구 아카데미는 주로 프로에서 은퇴한 유명 선수들이 운영하며 고가의 장비를 갖추고 학생 선수들의 투구와 타구를 분석한다. 일대일 맞춤 교육이다. 방과후나 주말 과외를 받는 중·고교생이 주요 고객이다.
학생 선수와 학부모 입장에서 야구 아카데미를 통한 과외는 소비자로서 선택권을 행사한 것이다. 미국에서는 오래전부터 이런 형태의 아카데미들이 운영돼왔다. 트레버 바워, 클레이턴 커쇼 등 최고 메이저리거들도 사설 기관에서 자신의 피칭 데이터를 보고 폼을 수정한다.
학교를 공교육, 아카데미를 사교육으로 본다면 둘의 공존은 자연스럽다. 우열을 가리지 말고 부족한 점을 서로 보완한다면 나쁠 것이 없다. 그러나 현실은 학생 선수의 사교육 비중이 지나치게 커지고 그에 따른 부작용이 작지 않아 문제다.
요즘 중·고교 야구부 감독·코치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학생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매우 제한적이다. 학교에서 훈련할 시간이 대폭 줄었기 때문이다. 지난 10여년 동안 ‘학생 선수 학습권 보장’이 체육계 화두였다. 학생들을 ‘운동하는 기계’ 아닌 ‘공부하는 선수’로 성장하게 돕자는 취지다. 교육부는 경기나 훈련 참가로 인한 학생 선수들의 결석 인정 일수를 점차 줄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스포츠 공교육 현장은 사실상 마비 상태에 가까워졌다. 현실적으로 시간적 여유가 없다보니 가장 중요한 체력과 기본기를 키워주기보다는 당장 진학을 위한 실전용 잔기술을 가르쳤다. 그나마 저학년에게는 신경 쓸 여력이 없다. 이제는 오히려 “아카데미에서 배우라”고 보내게 되는 경우도 다반사다.
학습권을 보장하자는 정부의 방침에는 백번 동의한다.
그런데 수업일수가 ‘교육의 단위’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 수업일수를 채우면 충분한 인성교육과 전인교육이 이뤄질까. 학생 선수가 입시를 치르는 학생과 똑같이 앉아 수업을 받는다고 같은 효과를 얻을 수 있는 것일까.
스포츠 공교육의 위축은 기회의 불평등을 초래한다. 사설 아카데미 수강료는 결코 저렴하지 않다. 원포인트 레슨이 수십만원, 월 수강료는 수백만원이다. 공교육의 비중이 작아지니 학부모의 경제력이 학생 선수 기량 향상을 좌우하게 되는 상황이다. 야구 수업에는 무료인 EBS 방송도, 값싼 인터넷 강의도 없다. 고액 일대일 과외만 있을 뿐이다.
“경기만 잘해도 대학 간다”는 시대는 지났다. 대학, 프로에서조차 기본기를 지적받는 선수들이 쏟아진다. 특기전형이 보편화됐다. 스포츠도 분명 재능인데 수업일수를 카운트하는 것은 도리어 운동할 자유와 권리를 빼앗는 것이 아닐까.
학생 선수들이 학교에서부터 각자에게 필요한 교육을 충분히 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 그것이 꼭 수업일수여야 하는지는 의문이다. 체육도 교육의 일부다. 좋은 지도자로부터 배운다면 스포츠만큼 좋은 교육이 어디에도 없다고 생각한다.
공부는 중·고교 때만 하는 것이 아니다. 평생 여러 사람들과 야구 해온 나도 여전히 야구와 사람을 배우고 있다. 학생 선수들에게 단지 수업일수를 채우게 해놓고 교육시킬 책임을 다했다고 생각한다면 너무도 권위적이다. ‘스포츠맨’이 되고자 하는 학생들을 위해, 지금 어른들은 정말 잘하고 있는 것일까.
선동열 전 국가대표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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