핍박의 역사..죽음의 노역·수탈

제주방송 김동은 2022. 8. 15. 21:00
자동요약 기사 제목과 주요 문장을 기반으로 자동요약한 결과입니다.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일제 강점기 내내 제주는 일본에 엄청난 수탈의 대상이었습니다.

특히 1940년대에 이르러서는 제주에서 온갖 공출에다, 강제 노역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제주는 해방 직전에 최고 요충지였습니다. 그 요충지에 살았던 제주도민들은 강제동원과 물적 수탈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장 어려웠던 시기를 살았고..."

전쟁의 위기와 강제 노역, 수탈을 간신히 견뎌냈던 제주도민들에게 불과 2년만에 시작된 4·3의 광풍은 수많은 제주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가 버렸습니다.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앵커)

일제 강점기 내내 제주는 일본에 엄청난 수탈의 대상이었습니다.

특히 1940년대에 이르러서는 제주에서 온갖 공출에다, 강제 노역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광복절을 맞아 우리가 잊지 말아야할 역사입니다.

김동은 기잡니다.

(리포트)

지난 1945년 9월 제주에서 진행된 일본의 항복 조인식.

당시 제주는 일본군이 가장 많이 주둔해 있어, 미군이 따로 항복 문서를 받았습니다.

주한미육군사령부 일일 정보 보고를 보면, 당시 제주에 있던 일본군은 5만8천여명으로,

남한 전체 병력의 절반 가량이나 제주에 주둔하고 있어, 따로 명시돼 있을 정돕니다.

이처럼 일본군이 밀집한 건, 1940년대 들면서 제주를 군사 요새화했기 때문입니다.

한라산 해발 1천2백미터 지점 등 산간 곳곳에 진지동굴을 비롯해, 비행장과 탄약고 등도 함께 건설됐습니다.

모두 제주도민들의 강제 노역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이런 강제 노역은 어린이, 부녀자 가리지 않았고, 수탈도 계속됐습니다.

제주 해녀들은 다른 나라에서 물질을 하기도 했는데,

일본은 제주 해녀들에게 빼앗은 감태를 이용해 의약품 등 군수물자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부용식 / 제주해녀박물관장

"그분들의 고초가 굉장히 심했습니다. 일본 자본가, 일본 상인들의 착취가 굉장히 심했죠. 제주 해녀들이 바깥 물질을 하면서 생산된 생산량의 60~70%를 일본 상인들이 가져가 버렸죠"

일본군의 결사 항전의 최후 보루였던 제주는 지난 1945년에만 6차례에 걸친 미군의 공습까지 이어지면서 전쟁의 위기에 직면합니다.

20만명이 숨진 제2의 오키나와 섬이 될 수 있었던 위기 상황이었습니다.

박찬식 / 제주문화진흥재단 이사장

"제주는 해방 직전에 최고 요충지였습니다. 그 요충지에 살았던 제주도민들은 강제동원과 물적 수탈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장 어려웠던 시기를 살았고..."

전쟁의 위기와 강제 노역, 수탈을 간신히 견뎌냈던 제주도민들에게 불과 2년만에 시작된 4·3의 광풍은 수많은 제주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가 버렸습니다.

JIBS 김동은입니다.

영상취재 윤인수

JIBS 제주방송 김동은(kdeun2000@hanmail.net) 윤인수(kyuros@jibs.co.kr) 기자

Copyright © JIBS.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