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속되지 않을 결심

박미향 2022. 8. 15.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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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최근 각본집이 큰 인기를 얻은 영화 <헤어질 결심>. 씨제이이엔엠 제공

[편집국에서] 박미향 | 문화부장

“날 사랑한다고 말하는 순간 당신의 사랑이 끝났고 당신의 사랑이 끝나는 순간 내 사랑이 시작됐죠.”

탕웨이(영화 <헤어질 결심>의 송서래)의 목소리로 들은 사랑 고백을 활자로 보면, 그 맛이 영화와는 사뭇 다르다. 그래서일까. <헤어질 결심> 각본집은 지난 5일 출간되자마자 2주간 교보문고 종합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다. 예약판매(7월19일)를 시작한 지 하루 만에 예스24 종합 베스트셀러 1위라는 기록도 세웠다. 감독이 시퀀스마다 꽉꽉 심어놓은 물음표를 풀기 위해 관람객들이 구매에 나선 것일까. 반한 것은 소장하고야 마는 요즘 젊은 세대의 취향이 반영된 결과일까. 대단한 흥행작도 아닌데 말이다. 어찌 됐건, 이례적인 일인 것만은 분명하다. 판매는 순항 중이다. 각본집을 출간한 을유문화사 쪽은 13일 기준 대략 5만5000권 이상 팔렸다고 밝혔다. ‘불황’을 달고 사는 출판업계에선 보기 드문 사례다.

최근 각본집이 큰 인기를 얻은 영화 <헤어질 결심>. 씨제이이엔엠 제공

영화 각본집이 주목받기 시작한 때는 2019년. 영화 <기생충> 각본집 출간이 계기가 됐다. 그해 5월 <기생충>을 개봉한 봉준호 감독은 석달여 뒤 각본집과 스트리보드북을 묶은 책을 출간한다. 앞서 7월에 <기생충>은 경이로운 기록을 세운다. 개봉 53일 만에 1000만 관객이 든 영화로 등극한 것이다. 각본집은 단숨에 화제가 됐다. 봉 감독의 인터뷰와 영화에 빠진 미공개 신도 포함돼 <기생충> 마니아라면 열광하고도 남았다. 아이돌 스타들의 굿즈 같은 특별한 책이 됐다.

이후 각본집 출간은 영화뿐만 아니라 드라마 영역으로까지 확대됐다. 교보문고 자료를 보면 올 상반기 출간된 각본집만도 17종이다. ‘드라마·시나리오 분야’에서 발행된 도서 종수는 73종(8월 기준)에 이른다. 이 분야 1위는 <헤어질 결심>. <그해 우리는> <시맨틱 에러> <옷소매 붉은 끝동> <멜로가 체질> <우리들의 블루스> <악의 마음을 읽는 자들> <연모> <술꾼도시여자들>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 등이 10위권 안에서 각축전을 벌이고 있다. 영상과 결합한 책이 각광받는 세상이 된 것이다.

이런 세태 때문인지, 소설가가 아예 창작 초기부터 영상화를 염두에 두고 집필을 시작하는 경우도 생겼다. 작가 에이전시 블러썸크리에이티브(블러썸)는 씨제이이엔엠과 손잡고 원천 아이피(IP·지식재산권) 발굴을 위한 프로젝트 ‘언톨드 오리지널스’(Untold Originals)를 진행하고 있다. 이 프로젝트는 양사가 공동으로 기획한 아이피를 단행본으로 먼저 출간하고, 이를 영상화하는 게 목표다. 블러썸 소속 작가 김중혁, 배명훈, 김초엽, 천선란 등이 참여한다. 지난 5월 발표된 이 시리즈 첫번째 작품은 작가 배명훈의 <우주섬 사비의 기묘한 탄도학>이다. 배 작가는 “설명만으로 끝나도 되는 부분을 영상 처리를 위해 두 사람의 대화로 풀거나 캐릭터를 더 만들었다”고 말했다.

영상화를 전제로 한 소설 쓰기는 작법의 작은 변화를 만든다. 과거 문학이 묘사에 치중했다면 장면에 집중한다. 느리게 굴러가는 사건이 아니라, 굴곡 많은 서사가 빠르게 전개된다. 개성 강한 캐릭터 수가 늘고, 그들은 주로 대화로 소통한다. 대화는 곧 대사로 이어질 확률이 높다. 이쯤 되면 ‘문학이란 무엇인가’란 고민에 빠지게 된다. 형식이, 전제 조건이 알맹이의 질을 결정하게 되는 게 아닌가 하는 노파심이 든다. 김중혁 작가가 짚었듯이 “다양한 방식으로 글을 써온 작가들에게 또 하나의 채널이 생긴” 반가운 소식이자 박수 받을 만한 문학계의 실험이자 도전일 수 있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도전은 예상치 못한 작동 방식을 만나 개인의 자발적 복종을 은밀하게 추동해내며 천박한 이익 추구로 귀결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이야기를 짓는 농부들이 거대 영상 미디어에 종속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주도권을 유지하며 자신들의 새로운 서사를 충분히 생산하기를 당부한다.

우린 더 많은 ‘이야기’가 필요한 시대에 살게 될 것이다. ‘100살 시대’에 인공지능까지 발달해 사실상 인간이 할 일은 줄고, 그 벌어진 틈을 파고든 공허함은 인간의 시간에 단단하게 뿌리내릴 것이다. 나와 너를 이어주는 이야기가 더 필요한 이유다. 우리 시대 작가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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