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대구의 순례지를 걷다

한겨레 2022. 8. 15.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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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대구 중구 관덕정 순교기념관. 사진 한승훈

[세상읽기] 한승훈 | 종교학자·원광대 동북아시아인문사회연구소

이번 여름휴가를 대구로 떠난다고 했을 때 주위에서는 미쳤냐고 했다. 하필 이 폭염 속에 한국에서도 가장 더운 도시로 꼽히는 ‘대프리카’로 가냐는 얘기였다. 그러나 어차피 이번 휴가 기간 폭염과 폭우를 모두 피할 수 있는 피서지 같은 건 한반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원래 목적이었던 친척 방문을 마친 다음날 아침, 한적한 외곽 숙소에서 구도심으로 향했다. 처음 방문하는 대구 도심은 인상적이었다. <갈등 도시>의 저자 김시덕이 지층(地層)에 빗대어 ‘시층’(時層)이라는 단어로 표현했듯, 오래된 도시에는 여러겹의 시간이 쌓여 있다. 비교적 최근에 세워진 고층빌딩들과 ‘힙한’ 가게들 사이에는 20세기 후반, 심지어는 식민지 시기 흔적까지 느껴지는 골목들이 숨어 있었다.

‘성 이윤일 요한’ 상. 사진 한승훈

종교 연구자의 버릇은 어떤 여행지에 가더라도 기어이 종교와 관련된 답사지를 방문하고야 마는 것이다. 오늘날 현대백화점과 동아백화점이 세워진 반월당 지역에 있던 관덕정에서는 조선시대 경상감영에서 사형 판결을 받은 중죄인들의 처형이 이뤄졌다. 그 가운데에는 성 이윤일 요한을 비롯한 박해 시기 천주교 순교자들도 있었다. 성인의 유해를 모신 순교기념관이 한옥 정자 모양을 본떠 세워지고 관덕정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그 때문이다. 그 맞은편에는 1910년대에 세워진 장로회 교회인 대구남산교회가 있다. 이곳의 명물은 일제강점 말기 수탈을 피해 땅에 묻어뒀다가 해방되던 날 다시 꺼내 울렸다는 ‘광복의 종’이다.

‘광복의 종’. 사진 한승훈

관덕정 순교기념관 전시 공간 한편에는 다른 천주교 순교자들과 함께 동학의 교조 수운 최제우가 소개돼 있었다. 최제우 또한 병인박해가 시작되기 직전인 1864년 이 장소에서 처형됐다. 전국 각지에서 순례지로 조성되고 있는 가톨릭 순교성지는 종종 해당 장소의 역사적 의미를 자신들만의 기억으로 독점하려 한다는 비판에 직면하곤 한다. 조선시대 지방감영 처형장 터나 서울의 새남터, 서소문 밖 등은 천주교 순교자들만이 아닌 모든 ‘반역자’들의 절명 장소였기 때문이다. 사실 천주교보다도 먼저 관덕정 성지화를 시도한 것은 동학계 교단인 상제교였다. 해월 최시형의 제자인 상제교 교주 구암 김연국은 관덕정 형장 터에 세워진 사찰인 묘심사를 매입하고 근처에 최제우의 순도비를 세웠다. 오늘날 그 건물과 비석은 남아 있지 않지만, 2017년 천도교에 의해 새로 건립된 순도비를 볼 수 있었다.

동학 교조 수운 최제우 순도비. 사진 한승훈

대구에는 최제우와 관련된 또 다른 장소가 있다. 옛 경상감영 자리에 있는 종로초등학교 교정에는 수령 400년가량의 회화나무 한그루가 있다. 지역의 전승에 따르면 최제우의 사형이 결정되는 순간 이 나무에서 수액이 눈물처럼 흘러내렸다고 한다. ‘최제우 나무’라는 이름으로 보호수로 지정돼 있는 이 나무 곁에는 또 하나의 ‘순교’ 기념물이 있다. 요즘은 보기 어려워진 ‘반공소년 이승복’ 동상이다. 임지현은 <희생자의식 민족주의>에서 국가와 그 이념을 위한 죽음을 신성시하는 관행과 그리스도교 순교 전통을 모델로 한 이탈리아 파시즘 정치문화의 관련성을 지적한 바 있다. 공교육 현장의 이승복 동상은 묘하게 박정희 전 대통령을 닮은 화랑 동상과 함께 지난 세기에 번성했던 국가주의적 세속종교의 성소를 구성하고 있었다.

‘반공소년 이승복’ 상. 사진 한승훈

현대 한국에서 영적 순례와 관광상품화를 위한 성지 공간 창출은 크게 두가지 형태로 이뤄진다. 하나는 ‘성역화’ 유형으로, 특정 제도종교가 부지를 확보해 그 내부에 건물과 순례 장소들을 포함하는 독점적, 배타적인 공간을 조성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순례길’ 유형으로, 지방자치단체와 여러 종교단체가 공동으로 참여해 역사적, 종교적, 문화적 의미를 담고 있는 장소들을 선으로 연결하는 형식이다. 필자는 ‘정화’를 명목으로 기존 경관의 파괴를 동반하는 성역화보다는, 산만하게 뒤엉킨 장소의 의미들을 그대로 노출하는 순례길 개발 쪽이 비교적 바람직하다고 본다. 다만 관 주도의 관광 개발 목적으로 이루어지는 순례길 사업이 종종 종교단체 사이 주도권 다툼으로 이어지는 현실도 무시할 수 없다. 뜨거운 여름 대구 산책은 어떻게 하면 전국 도시의 수많은 순례지가 가진 매력이 보다 공적인 가치를 바탕으로, 보다 많은 사람에게 전달될 수 있을까 하는 고민과 상상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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