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곡물 수출 길 열려도 아프리카·중동 식량난 해소 전망은 여전히 막막
최근 흑해 항만을 통한 우크라이나의 곡물 수출이 재개됐지만 심각한 식량난에 직면한 아프리카·중동 지역 국가들의 식량 수급 문제는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흑해 항로가 열린 뒤 수출된 곡물 대부분이 주식으로 쓰이지 않는 옥수수이고, 그마저도 유럽 등 식량 위기와는 관계없는 국가들로 빠져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 흑해항 수출재개 이후 처음으로 오데사항을 떠난 곡물 화물선 라조니호는 14일(현지시간) 시리아에 도착해 하역을 앞둔 것으로 알려졌다. 라조니호는 지난 1일 우크라이나산 옥수수 2만6527t을 싣고 출항해 7일 레바논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곡물 구매자가 운송이 5개월 이상 늦어졌다며 화물 인수를 거부하면서 입항도 거부당했다. 이후 라조니호는 튀르키예(터키)로 목적지를 돌려 지난 11일 메르신 항구에 정박했다가 다시 시리아 북서부 해역으로 이동했다.
일각에선 운송 지연이 아니라 애초에 곡물 종류 때문에 레바논이 화물 인수를 거부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레바논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밀 공급이 끊기면서 식량난에 처한 대표적인 나라 중 하나다. 레바논의 지난해 우크라이나산 밀 의존도는 80%에 이를 정도였다. 하지만 우크라이나는 전쟁으로 막혔던 흑해 항로가 뚫린 후 식량이 되는 밀보다는 동물 사료나 바이오 연료용 옥수수를 주로 수출하고 있다. 라조니호에 실린 옥수수 역시 동물 사료용으로 추정된다. 하니 무샬라 레바논식품수입협회 회장은 독일 DPA통신에 “우리는 옥수수가 아니라 밀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우크라이나에서 출발한 곡물이 부국들로 향하고 있다는 점도 아프리카·중동의 식량위기 해소 전망을 어둡게 하는 요인이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라조니호를 시작으로 13일까지 선박 16척이 곡물 45만t을 싣고 우크라이나 항구를 떠났다. 하지만 이들이 향한 곳은 튀르키예·이탈리아·아일랜드·한국 등 식량 부족을 겪고 있지 않은 나라들이다. 스테판 두자릭 유엔 대변인은 지난주 브리핑에서 이는 “상업적인 거래”에 따른 것이며 배들이 “계약서에 명시된 대로 가는 것이 정상”이라고 말했다. 우크라이나의 곡물 수출을 총괄하는 우크라이나·러시아·튀르키예·유엔 공동조정센터(JCC)엔 어떤 곡물이 어디로 전달되어야 하는지 등을 조언할 권한도 없다. 곡물 수출입이 민간 부문에 주로 의존하는 현 상황에선 이처럼 인도적 곡물 수송이 상업적 수송에 밀려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또 우크라이나 일부 항구가 기능을 회복하긴 했지만 농업기업들은 여전히 항구 이용을 꺼리고 있다. 흑해 항구 주변 해역엔 기뢰가 산재해 있어 화물을 운송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크라이나군이 마리우폴 등 도시를 되찾기 위해 러시아군에 반격하면서 남부 지역에선 전투도 한창이다. 우크라이나 주요 농업기업 중 하나인 MHP의 존 리치 회장은 “우리는 이 분야의 선구자가 되고 싶지 않다. 가만히 앉아서 어떻게 상황이 진행되는지 지켜볼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대신 MHP는 원래 아프리카나 중동으로 수출할 예정이었던 곡물을 트럭이나 기차에 실어 우크라이나 서부 국경을 통해 유럽 국가들로 보내고 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유엔은 전세 선박을 이용해 아프리카 식량 수급에 나섰다. 유엔 세계식량계획(WFP)이 임차한 ‘브레이브 커맨더’ 호는 14일 밀 2만3000t을 싣고 우크라이나 피데니항에서 출항해 에티오피아로 향했다.
김혜리 기자 harr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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