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북 '담대한 구상' 구체화..경협만 있고 안보는 일단 빠져
전문가 "2018년 북미합의보다 후퇴한 제안..북이 받을 가능성 거의 없어"
(서울=연합뉴스) 배영경 기자 = 윤석열 대통령이 15일 공개한 비핵화 로드맵 '담대한 구상'에는 북한이 핵을 포기하면 대규모 식량 공급부터 각종 인프라 지원까지 '종합선물 세트'에 가까운 경제협력을 제공하겠다는 내용이 담겼다.
그러나 정작 북한이 핵 개발의 명분으로 앞세워온 '대북 적대시 정책' 우려를 불식할 만한 안전보장 방안은 일단 빠져있어, 가뜩이나 최근 한층 강경해진 대남기조를 보이는 북한이 호응할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관측이 나온다.
윤 대통령은 이날 제77주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북한이 핵 개발을 중단하고 실질적인 비핵화로 전환한다면 그 단계에 맞춰 북한의 경제와 민생을 획기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담대한 구상을 제안하겠다"며 구체적 방안을 나열했다.
대규모 식량 공급 프로그램을 비롯해 발전과 송배전 인프라 지원, 국제교역을 위한 항만과 공항의 현대화 프로젝트, 농업 생산성 제고를 위한 기술 지원 프로그램, 병원과 의료 인프라의 현대화 지원, 국제투자 및 금융 지원 프로그램 등 모두 경제적 보상에 관한 것들이다.
북한 안전보장 방안은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당초 '담대한 구상'에 담길 북한 비핵화 상응조처는 '경제'와 '안보'의 두 축으로 구성될 것으로 예상됐다.
권영세 통일부 장관은 지난달 대통령 업무보고 후 브리핑에서 "담대한 계획 안에 북한이 제기한 안보 우려 및 요구사항을 포함해 경제적·안보적·종합적 차원의 상호단계 조치를 포괄적으로 담는 방안을 보고했다"고 밝혔었다.
북한은 그동안 미국 등의 '대북 적대시 정책'으로 안보를 위협받고 있어 핵무기 개발을 통해 전쟁을 억제하고 안전을 지키겠다는 명분을 내세워왔다.
따라서 비핵화를 위해선 북미관계 정상화나 군사적 신뢰 구축, 군비통제 등 북한의 이른바 '안보 우려'를 해소할 정치·외교·군사적 상응조처가 필요한데, 이번엔 관련 사항이 아예 빠진 것이다.
이와 관련, 북한에 대한 안전보장 문제는 한국보다는 미국이 제공할 수밖에 없는 영역이어서 윤 대통령이 언급하는 데 한계가 있었던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다.
정부는 '담대한 구상'과 관련해 미국 등과 협의를 지속해 왔는데, 아직 논의가 마무리되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아울러 윤 대통령이 "실질적인 비핵화로 전환한다면"이라고 언급한 점으로 볼 때 북한이 비핵화 조치를 취해야 우리도 움직이겠다는 생각이 깔린 것으로 보인다.
통일부는 '담대한 구상'과 관련, '선 비핵화'가 아닌 비핵화와 상응조치의 단계적·동시적 이행을 강조해 왔지만 드러난 언급만으로는 북한의 비핵화 조치가 선행돼야 한다는 데 일단 무게가 실린다.
북한이 취할 '실질적 비핵화 조치'가 무엇인지도 언급되지 않았다. '단계적·동시적 이행'이라면 핵시설 동결 등 북한이 취할 이른바 '초기조치'와 이에 따라 제공할 상응조처를 분명히 해놓는 게 바람직하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북한으로서는 자신들의 안보 우려를 불식시킬 방안이 없는 경협 위주의 이번 '담대한 구상'을 반쪽짜리 로드맵으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크다.
홍민 통일연구원 북한연구실장은 통화에서 "오늘 발표된 담대한 구상은 안전보장의 개념을 지나치게 경제 중심으로 국한해놨다"며 "이미 미국은 지난 2018년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에서 북한에 안전담보 제공을 약속했었는데 그보다도 후퇴한 제안이라 북한이 받을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고 예상했다.
더욱이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지난달 정전협정 체결 69주년 기념행사 연설에서 윤 대통령의 실명을 직함 없이 거론하며 '전멸'을 위협하고, 김여정 당 부부장도 최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발병 원인을 남측에 전가하며 '보복성 대응'을 거론하는 등 북한의 대남 강경 기조는 한층 거세진 상태다.
이처럼 최고지도자와 그의 여동생이 직접 나서 노골적으로 대남 적개심을 부추기는 상황에서 북한이 담대한 구상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리라 기대하는 건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이번 '담대한 구상'은 경제적 보상 위주라는 점에서, 또 북한의 비핵화 조치가 선행돼야 한다는 점에서 과거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이었던 '비핵·개방·3000'과 접근방식이 유사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비핵·개방·3000'은 북한이 핵을 포기하고 개방하면 1인당 주민 소득을 3천 달러까지 올려주겠다는 내용이었다.
북한은 '담대한 구상'에 대해 지난 7일 대외용 주간지 통일신보를 통해 "10여 년 전 남조선 각계와 세인으로부터 실현 불가능한 흡수통일문서로 지탄받고 역사의 쓰레기통에 던져졌던 이명박 역도의 비핵·개방 3000을 적당히 손질한 것"이라고 폄훼한 바 있다.
ykba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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