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근의 파란 코끼리] 전운이 드리운 나라/정신과의사

2022. 8. 15. 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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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운(戰雲)이란 말이 있다.

전쟁의 구름.

설마 전쟁이 나겠냐는 막연한 기대도 하지 말고, 전쟁이 날 게 뻔한데 내가 뭘 어쩌겠냐는 자포자기도 하지 말고,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지금의 현실에서 해결책을 도모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

오늘도 뉴스를 들으면 곳곳에서 검은 먹구름 같은 전운의 소식이 한가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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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근 정신과의사

전운(戰雲)이란 말이 있다. 전쟁의 구름. 아직 전쟁이 난 것은 아니지만 십중팔구 전쟁이 날 것 같은 불길한 기운. ‘war cloud’라는 영어 표현이 있는 걸 보면 근대에 도입된 서양 개념의 말인 것도 같다. 아니면 불길한 예감을 먹구름이 덮쳐 오는 것처럼 느끼는 것은 동서를 막론한 인간의 공통적 심성이거나.

정신과 용어 중에도 비슷한 느낌의 단어가 있다. ‘delusional atmosphere’. 우리말로 번역하면 망상적 대기 혹은 망상적 기운이라고 해야 할까. 조현병 등의 대표적 증상인 망상(delusion)이 생성되는 한 단계를 이르는 말이다. ‘내 귀에 도청 장치가 있다’, ‘정보기관이 나를 몰카로 감시한다’ 같은 적나라한 피해 망상은 어느 날 갑자기 완성된 형태로 머릿속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다. 처음엔 마치 구름 같고 기운 같은 막연한 형태로 시작한다.

병이 없는 사람들도 가끔 비합리적인 의심이 들 때가 있다. 지금 이 힘든 상황은 누군가 나를 의도적으로 해코지하기 때문은 아닐까? 우리 대부분이 그 생각을 더 발전시키지 않는 이유는 우리에게 ‘현실 검증력’이 있기 때문이다. 에이 그럴 리가. 여러 정황상 그건 과한 생각이야. 망상의 정신병리는 이 현실 검증력의 손상에서 시작된다. 견고하던 현실 검증력의 댐에 조금씩 균열이 생긴다. 느린 속도로 그 균열의 틈에 의심이 새어들고, 의심은 점차 확신으로 변해간다. 사람에 따라 이 변화는 수년에 걸쳐 일어나기도 하기에 제3자의 눈엔 쉽게 보이지 않는다. 주위에서 알게 되는 것은 현실 검증력의 손상이 많이 진행돼 공고해진 망상이 기이한 말과 행동으로 드러나기 시작할 때다. 제3자의 눈엔 그렇지만, 당사자는 수년에 걸친 시간 동안 ‘내 주변이 뭔가 이전과는 다르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그 느낌을 ‘delusional atmosphere’라 부르는 것이다. 확진적 망상의 단계에 이르기 전, 아직은 현실 검증력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 느끼는 그 무언가 불길한 느낌.

치료의 적기는 이때다. 암에 비유하자면 1기라고나 할까. 증상이 굳어지기 전인 이 시기에 치료를 시작해야 예후가 좋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많은 경우에 이 시기를 놓친다. 소화불량이겠거니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 위암의 적절한 진료 시기를 놓치듯이. 증상이 예사롭지 않아 병원을 찾았을 땐 이미 위의 암종이 폐와 간으로 전이돼 손을 쓸 수 없는 상태이듯이.

그렇게 생각하면, 몸과 마음에서 느껴지는 작은 불편감들은 불편이 아니라 아직 회복의 가능성이 남아 있음을 알려 주는 고마운 전령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전운이란 것 역시 마냥 불길한 것만은 아니다. 여러 정세로 미루어 곧 전쟁이 일어날 것 같은 기운을 느낀다는 것은 파국을 막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목도하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설마 전쟁이 나겠냐는 막연한 기대도 하지 말고, 전쟁이 날 게 뻔한데 내가 뭘 어쩌겠냐는 자포자기도 하지 말고,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지금의 현실에서 해결책을 도모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 그런 의미에서의 전운.

오늘도 뉴스를 들으면 곳곳에서 검은 먹구름 같은 전운의 소식이 한가득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 전쟁과 미중 사이의 갈등은 끝날 줄 모르고 환율과 물가는 요동치는데, 출범 100일도 채 되지 않은 새 정부 쪽에선 하루가 멀다 하고 각종 파열음이 들려온다. 설상가상으로 잦아든 줄 알았던 코로나의 재창궐에 미증유의 수해 그리고 그에 대한 정부의 미숙한 대응까지. 한 평범한 시민으로서, 부디 이 전운의 경고를 알아듣는 현명한 귀가 많이 열려 있기만을 간절히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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