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진의 청안백안靑眼白眼] 이것은 법치주의가 아니다

정인진 변호사·법무법인 바른 2022. 8. 15.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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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 모임과 달리 경찰엔 ‘불법’
시행령 개정만으로 경찰국 신설
경찰이나 사회 의견 수렴도 없어
‘권력 제어’ 최소한의 장치 무시
대통령 지지율 하락 원인 중 하나

윤 하사는 내무반장으로서 더할 수 없는 권력을 휘둘렀다. 모두들 벌벌 떨었다. 이상할 정도로 다들 무서워하는 그에게 비결을 물었다. “칭찬할 일에도 화를 내고 화를 낼 일에도 칭찬을 해. 한마디로 미친 척해야 날 무서워하지”라고 말하며 그는 씩 웃었다. 이수태의 <어른 되기의 어려움>에 나온다. 약속과 기대의 체계인 규범과 권력의 발생 기제가 가지는 관계를 보여주는 좀 섬뜩한 이야기다.

정인진 변호사·법무법인 바른

법치주의는 영미법계에서는 법의 지배 원칙에, 대륙법계에서는 법치국가 이론에 바탕을 두고 발전해 왔다. 어느 것이든 그 기본적 이념은 자의적인 권력 행사의 제한에 있다. 17세기 영국의 대법관 에드워드 코크는 국왕 제임스1세와의 논쟁에서 “왕이라 하더라도 신과 보통법 아래에 있다”라고 말했다. 법의 지배의 반대편에 서 있는 것은 사람에 의한 지배다. 하지만 민주정은 사람을 믿지 않는 데서 출발한다. 플라톤이 말한 “가장 좋은 법보다도 훌륭하게 통치할 수 있는 특출한 사람” 따위는 본래 없다.

권력자는 때때로 ‘법대로’ 했다는 말로 자기의 행위를 정당화한다. 그러나 법치주의는 법 규정에 따르는 것을 기본으로 하면서도 더 나아가 법의 이념과 정신에 따를 때 비로소 제값을 지닌다. 합법성만으로는 부족하다. 합법성의 뒤에서 자의적 권력 행사를 도모하는 것은 법을 통치자의 신념과 의사를 실현하는 수단으로 쓰는 ‘법에 의한 지배’에 지나지 않 는다.

법치주의에서 말하는 법의 일반성이란 법이 누구에게든 똑같이 적용되어야 한다는 요청을 말한다. 법은 누구의 것이든 특수한 이해관계에 대하여 중립적이어야 한다. 이중기준의 적용은 법치주의의 부정이다. 때와 곳에 따라 다르고 법 적용의 대상이 되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면 그런 법 적용은 법치주의라고 할 수 없다. 경찰 수사권에 대한 통제는 꼭 필요하다. 그러나 검수완박을 막으려는 검사들의 모임엔 아무 말도 않으면서, 행정안전부 내에 경찰국을 신설하는 데 반대하여 의견을 내려고 모인 경찰관들의 집회는 불법이라 하며 제재한다면 이는 이중기준을 적용하는 것이다. 법치주의가 아니다.

법치주의의 내용 중 하나는 합법률성이다. 국회가 만든 법률인 정부조직법의 위임도 없이 또 그 법의 취지에 반하여 행정부의 입법형식인 시행령의 개정만으로 행안부 내에 경찰국을 설치하는 일은 법치주의에 어긋난다. 그런데도 이 조치를 놓고 ‘법대로’ 한 것이라고 하면 오해이거나 억지다.

법치주의가 내포하는 또 다른 원칙은 적법절차다. 절차적 정의를 확보하기 위하여 당사자에게 고지하고 의견진술의 기회를 부여하라는 것이다. 이번 시행령 개정에는 당사자인 경찰관 다수의 의견이나 사회 일반의 의견을 수렴하는 과정이 없었다. 절차적 정당성을 무시하는 짓은 법치주의가 아니다.

법치주의는 신뢰를 보호하고 예측 가능성을 부여하여 법적 안정성을 도모한다. 그런데 정치인들은 법으로 임기를 정한 직위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새 정부의 이념과 거리가 멀다는 이유로 자진사퇴를 운위한다. 국민권익위원장과 방송통신위원장이 그 예다. 심지어 국민의힘 소속 어느 의원은 국민권익위원장을 겨냥하여 “윤석열 정부가 출범한 지 두 달이 되어가는 상황에서 이 자리에 앉아계신 분들 중 어색한 분들이 눈에 띈다”라고 말했다. 법치주의는 법의 기본적 이념에 관한 사항을 두고 정권의 변이에 따라 이랬다저랬다 함을 용인하지 않는다. 법에 보장된 임기를 지키는 것이 ‘어색하다’고 하여 자진사퇴를 말하는 것은 법치주의가 아니다.

윤 대통령은 정부의 각료나 기타 중요 직위에 검사 출신 인사들을 대거 임명해 놓고, 미국은 정부 법률대리인의 경험을 가진 사람이 정·관계에 폭넓게 진출하고 있으며 그게 법치국가라고 했다. 하지만 법치주의는 법률가들의 통치가 아니라 법의 통치를 말한다. 법이 법률가들의 전유물은 아니지 않은가. 미국의 민주주의가 저만큼 유지되어 있는 것은 의회나 행정부에 법률가들이 많아서가 아니다. 식민지 시절 당했던 영국의 폭정을 자국의 역사에서 되풀이하지 않도록 세계 최초로 성문헌법을 제정하고, 그 헌법의 이념을 시대적 상황에 맞추어 끊임없이 재해석하고, 권력 분립 원칙을 엄격히 지켰기 때문이다. 이게 법치주의다.

왜 허약해져 가는 법치주의를 말하는가. 늘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안전과 양식을 지켜야 공동체가 붕괴하지 않기 때문이다. 법치주의는 물론 좋은 정치의 충분조건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권력이 비이성적으로 작동하지 못하게 하려는 최소한의 장치다. 윤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이 낮은 원인 중 하나는 이런 최소한의 장치마저도 무시한 데 있을 것이다.

정인진 변호사·법무법인 바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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