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의 순간, 근현대사의 조연이었던 여성들에게”

최윤아 2022. 8. 14.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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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 33인 여성독립운동가에게 바치다
독립선언문 33인에 보이지 않는 여성
‘이등시민’ 홀대에도 독립운동 나서
류준화 작가 그린 초상화로 ‘부활’
서울 종로구 창신동 여성역사공유공간 ‘서울여담재’에서 열린 ‘‘33인 여성독립운동가에게 바치다’ 전시. 최윤아 기자

1920년 8월3일 밤 평안남도 경찰국 청사에 폭탄이 날아들었다. 미국 의원 시찰단 방문을 앞두고 한국 독립의 필요성을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해 대한광복군총영(대한민국임시정부 군사조직)이 감행한 ‘폭탄 거사’였다. 이 거사를 제 손으로 실행한 이들 가운데 안경신(1888∼미상)이 있었다. 대원 가운데 유일한 여성이자, 임신부였다. 이듬해 3월 그는 일제에 붙잡힌다. 태어난 지 열흘 된 아기를 품에 안은 채로. 사형을 선고받은 그는 동지들의 구명활동 끝에 감형돼 1927년 출소하지만, 언제 어디서 생을 마감했는지는 여태 알려지지 않았다. 생전 그의 모습을 담은 사진은 뿌옇게 바랜 흑백사진 한 장뿐이다. 그마저도 2019년에 발견됐다.

그런 그가 분홍빛 저고리를 입은 친근한 얼굴로 되살아났다. 류준화 작가가 기록물을 바탕으로 상상을 더 해 새롭게 그려냈다. 서울 종로구 창신동 여성역사공유공간 ‘서울여담재’에는 안경신을 비롯해 여성독립운동가 33인의 초상화가 전시장 한쪽 벽을 가득 채우고 있다. 오랜 시간 흑백사진에 박제되어 있던 이들은 류 작가의 손끝을 거쳐 부드러운 파스텔톤 색채를 입고 관람객을 맞이한다.

“여성독립운동가 33인의 사진을 보는데, 제 주변에 있는 사람들과 닮았다,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과거의 인물이 아니라 현재 인물처럼 그려내고자 ‘뽀샤시’한 색을 입혔습니다.”

류 작가가 이 전시 작업을 시작한 건 지난해 하반기. 근현대사 속에서 조연이나 엑스트라로만 등장했던 여성독립운동가를 주인공으로 그려내고 싶었다. “비록 독립선언문 대표자 33인의 명단에는 없지만, 3·1 운동 현장에 있었을 것 같은 여성들을 발굴하려고 했어요. 간호협회와 기생협회, 이화학당 학생들, 유학파 출신 여성들이 독립운동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죠. 유관순이나 나혜석처럼 알려진 인물들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이들과 감옥이나 학교에서 함께했던 다른 여성운동가들을 ‘발견’할 수 있었어요. 1920년대 신여성들의 네트워크를 하나하나 복원해 가는 느낌으로 작업했습니다.”

서울 종로구 창신동 여성역사공유공간 ‘서울여담재’에서 열린 ‘‘33인 여성독립운동가에게 바치다’ 전시. 서울여담재 제공

류 작가가 조명한 33인 가운데는 한국 최초 여성비행사이자, 임시정부 독립운동 자금 모금에도 앞장서 옥고를 치른 권기옥, 기녀로 활동하다 3·1 운동에 참여했던 정칠성 등 독립을 위해 삶을 헌신했던 신여성들이 포함됐다. 이들의 생을 좇으며 류 작가는 오늘날의 ‘영페미’를 떠올렸다고 했다.

“3·1운동이라는 역사적 순간에도 ‘영페미’가 있었구나 싶었어요. 이분들이야말로 처음으로 신식 교육의 세례를 받았던 페미니스트 1세대잖아요. 이들 역시 서로 끈끈하게 연결하고, 연대하고 있었구나, 과거와 오늘의 영페미가 맥처럼 연결되어 있구나 느꼈습니다.”

과거와 현재의 ‘연결감’은 ‘리추얼 테이블’(제사상)에도 고스란히 녹아있다. 33인 초상화와 더불어 전시에 주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작품이다. 류 작가가 붓으로 차려낸 제사상은 낯설다. 마카롱과 와인이 함께 오르고, 제기에는 살아있는 새가 담겼다. 류 작가는 “1919년 (3·1 만세운동 때) 강당에 섰던 여성과 오늘날의 여성이 한 테이블에서 만나는 느낌을 주고 싶었어요. 과거와 현재가 조우하는 제사상이죠.… 여성이 차리지만, 여성은 가까이 갈 수조차 없던 기이한 제사상을 비틀기 위해 제기 안에서 알을 품고 있는 새를 그렸습니다. 제기의 용도를 생명을 품는 그릇으로 바꿔버리면서 가부장제에 대한 저항, 거부를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전남 나주에서 활동하는 류 작가는 주로 인터넷에서 관람객의 반응을 접했다. “한 관람객은 제가 그린 여성운동가의 초상화와 실제 사진을 한 사람씩 같은 사이즈로 편집해 블로그에 올렸더라고요. 간단한 설명까지 덧붙이고요. ‘앞으로 더 닮게, 열심히 그려야겠다’ 싶었어요. 하하”

서울여담재의 연구·전시 담당자는 “한 관람객이 ‘돌아가신 할머니가 생각난다. 할머니처럼 증거도 없고, 이름도 남아있지 않지만 독립을 위해 애써주신 분들이 너무나 많을 것’이라고 했던 게 생각난다”고 했다. 배민아 서울여담재 사무국장은 “여성역사공유공간이지만, 등산복 입고 잠시 들려 작품을 둘러보고 가는 남성들도 적지 않다”고 했다.

이번 전시는 오는 8월25일까지 열린다. 8·15 광복절은 휴무다.

최윤아 기자 a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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