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군에서 요리 훈련을 받아 서울서 개업하다"[주성하 기자의 '북에서 온 이웃']

주성하 기자 2022. 8. 14.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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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한식대첩에 북한 대표로 출전했을 때의 안영자 사장


#요리 훈련병

“이제부터 동무들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의 배려로 조선인민군의 식사를 책임지는 요리사로 훈련을 받게 되었습니다.”

일장연설을 하는 소좌 앞에 트럭에서 내린 10대 후반 청소년들은 차렷 자세로 바짝 긴장한 채로 서있었다. 입소식이 끝나고 군복으로 갈아입은 뒤부터 이들은 손에 칼을 들고 맹훈련에 돌입했다. 당시 만 16세 소녀 안영자 씨도 그들 중 한 명이었다.

1983년 평안남도 은산군 수양역 인근의 북한군 후방총국 기지에서 이들은 무려 2년 동안 스파르타식으로 각종 요리를 하는 훈련만 받았다. 군부 소속이라 식재료는 풍족하게 공급됐다. 평양상업대학에서 파견된 교수들이 학생들을 대상으로 1대1로 요리 교육을 해주었다. 교육생들은 군인 신분이라 가끔 총을 메고 달리는 훈련도 받았고, 무거운 마대를 메고 고지를 오르내리기도 했다. 유사시 요리사들도 음식을 메고 전장에 뛰어들어야 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처음 입소했을 때 교육생은 남자 6명, 여자 42명으로 모두 48명이었는데, 2년 과정을 버티고 졸업한 사람은 26명에 불과했다. 2년 교육 과정이 끝나자 신의주비행장과 순안비행장에 파견돼 6개월 실습과정도 거쳤다. 실습 과정을 거치자 이들에겐 평양상업대학 졸업생 자격과 함께 1급 요리사 자격증도 함께 주어졌다.

북한군은 일반 부대엔 요리사가 따로 있지 않다. 그러나 각종 장성급 초대소(별장)와 특수 임무를 수행하는 초대소에 전문 요리사를 배치할 필요가 있어 당시 군부 직속 요리사를 특별히 키워낸 것이다.

졸업과 동시에 안 씨는 군복을 입고 1986년 공군사령부 소속 함경북도 경성군 온포초대소 요리사로 파견됐다. 그곳은 그녀의 고향이기도 했다.

#1호 행사 요리사

안 씨는 경성에서 나름 잘 나가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임업대학을 졸업하고 현지 임산사업소 기사장을 했고, 어머니는 인민학교 교사였다. 그녀에겐 오빠 두 명과 남동생 1명이 있었는데, 4남매 중 유일한 딸이라 부모의 사랑도 독차지했다.

그녀는 공부도 곧 잘했다. 중학교 졸업하기 전 그의 포부는 의사가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방인 경성에선 의학대학에 추천받는 것이 매우 어려웠다. 결국 졸업하는 해 평양상업대학에 시험을 칠 자격을 얻게 됐다. 평양상업대학도 북한에선 여성들에겐 매우 선망 받는 대학으로 나쁘지 않은 조건이었다.

하지만 시험 치러 가기 전 아버지가 찾았다.

“영자야, 요즘 군에서 요리사를 뽑고 있는데, 평양에서 공부하기보단 거기에 가는 게 나을 것 같다. 평양상업대학 졸업 자격도 주고, 입당도 빨리 되고, 물자도 풍부한 좋은 초대소에서 복무할 수 있다고 하더구나. 고향에 돌아올 수도 있고…. 평양에서 상업대학 나와도 이런 곳에 들어가기 어렵다.”

16세 소녀는 당연하게 아버지 권고를 따랐다. 북에서 요리사란 직업은 한국과 달리 매우 귀한 직업이다. 당시엔 지방의 어느 군에 가봐야 식당이 서너 개 정도에 불과했다. 도시도 마찬가지. 식당은 출장을 다니는 사람들이나 가는 곳으로 인식되던 때였다. 요리사가 되려면 대학을 나와서 국가에서 임명장을 받아야 가능했다. 먹을 것을 다루는 요리사는 배급에 의존해 살지 않아도 되니 여성들에게 특히 인기가 있었다.

어느 날 집에 한 군관이 찾아와 안 씨를 만나 면담을 하고 돌아갔다. 신원조회 과정은 6개월이나 걸렸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집에 찾아온 소좌와 함께 열차를 탔다. 소위 ‘1호차’로 불리는 고급 열차였다. 평양으로 가는 줄 알고 들떴으나 평양역에서 수십㎞ 떨어진 수양역에서 내려 깊은 산골에서 훈련을 받을 줄은 생각도 못했다. 그래도 졸업하자마자 병사 중에선 가장 계급이 높은 특무상사 견장을 받고 고향에 있는 공군 초대소로 돌아올 수 있어 다행이었다.

함경북도 경성비행장은 북한군 공군 조종사를 키워내는 주요 기지이다. 북한군 비행사들은 조종사 과정 중 1년 동안은 이곳에 와서 비행기를 탄다.

안 씨가 배치를 받은 온포초대소는 유명한 주을온천 곁에 있는 경치 좋은 곳이었는데, 가보니 이곳엔 아프리카인들이 정말 많았다.

당시 아프리카 외교에 힘을 기울이던 김일성은 군사 원조의 하나로 아프리카 각국에서 선발된 군인들을 북에 불러 비행사로 양성하고 있었다. 짐바브웨, 탄자니아, 잠비아, 레소토 등 아프리카 각국에서 흑인 청년들이 몰려왔다.

안 씨의 첫 임무는 이들에게 요리를 해주는 것이었다.

아프리카인들의 주식은 빵과 우유, 버터였지만, 요리도 잘 먹었다. 가장 많이 사용하는 식재료는 돼지고기와 닭고기, 감자와 토마토였다. 감자는 푹 삶아 육류와 섞어 각종 요리를 만들었다. 돼지고기와 토마토를 함께 볶은 요리도 매우 인기가 있었다.

가끔 평양에 차출돼 갈 때도 있었다. 1980년대 짐바브웨 대통령, 레소토 총리 등 아프리카 귀빈들이 북한을 찾아와 김일성을 만나는 ‘1호 행사’를 할 때면 평양에 가서 연회장 만찬 요리를 함께 만든 적도 있다.

1993년 평양에서 찍은 사진. 옆의 아이는 상관의 아들이다.


#행복과 불행은 종잇장 차이

안 씨가 군 요리사로 성장할 동안 집안엔 좋은 일도 많이 생겼다.

우선 1986년에 아버지가 대외경제위원회로 자리를 옮겨 외화벌이를 하려 어머니와 함께 외국에 파견된 것이다. 처음 소련에 근무하다가 나중에 루마니아에 가서 노동당 자금을 마련하는 일을 맡았다.

북한에서 부모 모두 외국에 갈 수 있는 자격은 출신성분이 좋은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주어진다. 안 씨는 아버지의 출신성분이 얼마나 좋았는지는 잘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오빠들도 출신성분이 좋아야 가는 위치에서 빠르게 승진했던 것을 보면 나쁘지 않은 출신성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첫째 오빠는 큰 병원의 원장까지 지냈고, 둘째 오빠는 호위국 소좌로 있었다. 부모가 보내주는 돈으로 형제들도 풍족하게 살았다.

안 씨는 1994년 함경남도 마전에 있는 대남연락소 교관과 결혼했다. 남편의 아버지는 보위부 고위 간부였고, 북한에서 최고의 출신 성분으로 꼽는 항일투사 가문이기도 했다. 결혼 직후 마전으로 옮겨 그곳 초대소 요리사를 지냈다. 남편을 따라 이사를 다니며 원산과 간리 초대소 등 남파 간첩들이 주로 사용하는 초대소에서 요리사를 지냈다.

결혼 생활은 그리 행복하진 않았다. 남편은 한번 나가면 집에 잘 들어오지 않았고, 둘 사이에 아이도 없었다. 그래도 잘 나가는 남자와 결혼했다고 주변에서 부러워했다.

그러나 해외에 파견된 부모를 둔 유복한 생활, 잘 나가는 오빠들을 두었던 안 씨의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1997년 남동생의 사망과 더불어 그의 집은 풍지박살이 나기 시작했다.

두 살 어린 남동생은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 부모와 헤어졌다. 부모가 해외에서 돈을 벌고 형들도 누나도 다 집을 떠난 뒤라 통제를 할 사람도 없어졌다.

부모가 보내주는 돈으로 동생은 일본 귀국자 출신 등 부유한 청년들과 어울리며 지냈다. 이들은 틈만 나면 북한에서 허용되지 않은 불법 해외 비디오를 돌려보며 시간을 보내기 일쑤였는데, 당시 북한에서 돈 많은 청년들이 살았던 전형적인 일상이었다.

하지만 북한은 그런 식으론 절대로 안정적으로 살 수 없는 곳이다. 늘 생각지 못한 변수와 위험이 순식간에 찾아오기 때문이다.

동생도 그랬다. 1991년 12월 소련이 붕괴되는 것에 충격을 받은 김정일은 “썩어빠진 자본주의 날라리 현상을 철저히 뿌리 뽑으라”는 지시를 내렸다. 전국에서 무시무시한 검거선풍이 벌어졌고, 남동생도 체포됐다. 함께 금지된 영상을 보았던 친구가 체포돼 그가 주모자라고 고발한 것이었다.

동생은 1992년 5년형을 선고받고 악명 높은 함북 전거리교화소에 끌려갔다. 그렇지만 5년을 끝내 버티지 못하고 28살에 폐렴으로 사망했다.

북한에서는 감옥에서 수감 생활을 하는 것과 수감 중에 죽은 것은 하늘땅 차이이다. 형기를 마치고 풀려나면 죄를 씻었다고 보지만, 형기 중 사망하면 공화국의 법에 의해 심판을 받다가 죽었다고 평가해 온 가족의 출신성분이 반동 가족으로 바뀐다. 형기 중 사망하면 시신을 가족에게 돌려주지 않고 교화소 내에서 소각하며,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도 함구한다.

동생이 전거리수용소에서 수감됐을 때 안 씨의 형제들은 외국에 나간 부모들에게 이런 소식을 알리지 않았고, 동생과 연락이 되지 않는 이유를 거짓말로 둘러댔다. 부모가 걱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북한 당국도 마찬가지이다. 심경에 변화를 일으켜 도망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안 씨의 부모는 아들이 감옥에 끌려간 줄도 모르고 해외에서 지냈다.

하지만 동생이 사망하고, 1997년 황장엽 망명사건까지 터지자 북한 당국은 안 씨의 부모를 북으로 소환시켰다. 집에 돌아와서야 비로소 막내아들이 감옥에 끌려가 죽은 것을 알게 된 부모는 큰 충격을 받았다. 아버지는 비통해 하던 끝에 뇌출혈로 쓰러졌다.

의사였던 첫째 오빠는 병원에서 계속 일할 수 있었지만, 둘째 오빠는 군복을 벗어야 했다. 안 씨 역시 마찬가지였다. 1997년 그는 남편과 강제 이혼을 하고, 군복도 벗어야 했다.

집으로 와보니 그토록 자랑스럽던 아버지는 반신불수가 되어 쓰러져 있었고, 엄마도 병에 걸렸다. 그동안 벌어놓은 재산을 팔아 약값은 겨우 충당했지만, 점점 돈이 말라갔다. 당시는 국가에서 배급도 나오지 않았던 고난의 행군 시기라 먹을 것조차 점점 없어져갔다. 아버지를 살리려면 사향배꼽이 특효라는 말을 들었지만, 당시 가격이 1만 달러나 돼 도무지 살 수가 없었다.

한국에 도착해 하나원에 있던 시절의 안영자 사장.


#탈북

보다 못한 그는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선 중국의 친척집에 가서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판단했다. 그렇게 그는 1998년 처음으로 두만강을 몰래 넘어 중국으로 갔다. 그런데 친척이 그런 거액을 줄 리가 없었다. 그는 중국에서 몇 달 있으면서 바느질 등 온갖 잡일을 하며 돈을 벌어 북에 돌아갔다. 당연히 사향배꼽은 살 수가 없었다. 이듬해 아버지는 끝내 숨을 거두었다.

제대된 그에게 양강도 혜산에 사령부가 있는 9군단 요리사 제안이 왔다. 특별한 사람들만 신원조회를 거쳐 들어가는 초대소 요리사에서 민간인 중에 뽑아 들어가는 일반 군부 요리사로 신분이 바뀐 것이다. 혜산에 들어온 그는 군부 식당 요리사로 있다가 이후 여러 식당을 옮겨 다녔다.

졸지에 아버지와 남동생을 잃고, 남편과 이혼당한 뒤 안정적이고 풍족한 직업까지 잃은 그는 북한에선 더 이상 미래가 없다고 생각했다. 한번 다녀온 풍요로운 중국 생각이 계속 머리에 떠올라 일상생활조차 제대로 되지 않았다.

2001년 또다시 직장을 옮길 기회를 만나 중국에 넘어갔다. 중국에서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일하며 돈을 벌어 다시 북에 갔다. 그러다가 2005년엔 살던 집까지 팔고 아예 중국으로 넘어왔다. 중국에서 알았던 탈북한 친척 중 몇 명이 한국에 도착해 “북에서 살지 말고 남쪽으로 오라”고 전화를 했던 것이다. 그리곤 그들의 안내를 받아 한국으로 오는 브로커와 접선해 그해 9월 다른 탈북민 8명과 함께 일행을 이루어 한국으로 향했다. 몽골을 거쳐 한국으로 오는 루트였다.

# 생사가 갈린 몽골 국경

몽골 국경까지 이들을 인솔한 안내자는 헤어지기 전에 “계속 가면 철조망이 나오는데, 여기서부터 시작해 동쪽 방향으로 철조망 여러 개를 차례로 넘어 계속 가면 마을이 나온다”고 알려주고 돌아갔다.

몽골은 광활한 사막의 나라다. 자칫 길을 잃으면 목숨을 잃기도 하고, 몽골 내륙으로 들어가는 방향 감각을 상실하면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기도 한다.

일행은 다행히 중국으로 돌아가진 않았지만 사막에서 무려 엿새나 헤맸다. 낮에는 얼굴을 찌르는 듯한 태양열에 피부가 타들어갔고, 저녁엔 추워서 온 몸이 덜덜 떨렸다. 각자 9병씩 배낭에 넣고 떠난 물은 너무 일찍 바닥이 났고, 식량으로 준비한 빵은 도무지 목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8일 동안 얼굴이 4번 벗겨졌어요. 하루 종일 동물 뼈밖에 나오지 않는 모래사막을 헤매다가 갑자기 푹푹 빠져드는 진흙탕이 나오기도 해요. 그래도 거기에 물기라도 있으면 그 더러운 물을 허겁지겁 마셨죠.”

닷새째 되는 날 일행이 갈라졌다. 동쪽으로 향해 계속 가야 한다는 의견과 다른 방향으로 가야 된다는 의견이 갈라진 것이다. 논쟁할 힘도, 강제할 힘도 없었다. 결국 30대 중반 두 여성은 일행과 떨어져 다른 방향으로 갔다.

엿새째 저녁 안 씨의 일행은 사막에서 말라 죽은 나무 가지 3개를 발견했다. 더는 갈 힘도 없어 죽기 전에 불이라도 피우고 죽자고 의견을 모았다. 불을 피우고 일행은 빙 둘러 쓰러졌다. 몇 시간 지났을까. 갑자기 말소리가 들렸다. 몽골군 기마병 5~6명이 나타난 것이다. 이들은 일행에게 안대를 씌우더니 군 초소로 데리고 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잠시 뒤 트럭이 나타났고, 이들은 수감시설로 옮겨졌다. 소금과 밥이 나왔다.

다른 방향으로 향했던 두 여성은 불운했다. 그들도 한참을 가다가 나무를 발견해 불을 피웠다. 그런데 그들을 찾아온 군인들은 중국 군인들이었다.

한 명은 체포되자 자살하려고 정통편이라는 중국 감기약을 24알이나 한꺼번에 삼켰다. 거품 물고 쓰러지자 중국 군인들이 그를 병원으로 옮겼다. 그녀는 입원했던 병상에서 도망치는데 성공했다. 이후 여러 시련이 있었지만 그녀 역시 결국 한국에 왔다.

하지만 다른 여성은 북으로 끌려갔다. 일행 중 제일 아름다웠던 여인이었다고 한다. 나중에 북에서 온 사람들을 통해 그녀가 북송된 뒤 여러 차례 탈북했다는 죄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고 전해 들었다. 북에서 종신형은 곧 사형이나 마찬가지다.

# 재단사가 된 요리사

2006년 3월 안 씨는 하나원을 거쳐 경기도 부천에 집을 받았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했지만, 북에서 계속했던 요리는 하고 싶지 않았다.

북에 있을 때 그녀의 꿈은 남들처럼 화려한 옷을 입는 것이었다. 군 요리사로 근무하다보니 16살 때부터 줄곧 특무상사 견장이 달린 군복만 입고 살았던 것이다.

그는 서울 종로 5가의 한 양복점에 취직했다. 그렇게 옷을 디자인하는 법을 배우고 재단과 봉제 기술을 익혀나갔다. 가끔 그가 만든 요리를 먹어보곤 “정말 맛있다”며 식당을 차리라고 권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무시했다. 한국에 온지 얼마 안돼 한국 출신 남성과 결혼도 했다. 시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평범한 며느리이자, 옷 만드는 데 열심인 여성으로 살았다.

그런데 운명은 그를 재단사로 사는 것을 허락지 않았다. 2014년 한식대첩이라는 TV프로그램에서 경연에 참가할 북한 출신 요리사를 찾다가 그녀에게 연락이 온 것이다. 처음엔 거부를 했는데 집에 계속 찾아오는 바람에 응하게 됐다. 그는 북한팀으로 경연에 참가했는데, 프로그램에서 최종 5위를 했다.

“떡에서 떨어졌는데, 아무래도 북한식과 한국식은 음식이 많이 차이가 나죠.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정말 중요한 프로그램이었던 것 같아요. 그때는 그게 뭔지 모르니 그냥 대충했는데…”

한식대첩 출연 이후 사방에서 그녀를 찾는 전화가 왔고, 강연과 방송 출연 요청이 이어졌다. 탈북민 중에 북에서 요리를 했다는 사람은 많지만, 정규 교육을 이수하고 국가가 인정하는 정식 요리사로 있다 온 사람은 많지 않다. 안 씨는 강연을 준비하느라 머리 속에 들어있는 북한 요리 레시피를 120개나 정리해 자료로 만들었다. 북에서 제대로 요리사로 훈련받고, 현직에 있던 사람과 아닌 사람의 차이인 것이다.

얼떨결에 얻은 인기로 여기저기 강연도 다니고 TV에도 나가다보니 같이 사업을 하자는 제안도 들어왔다. 처음에 일산에서 ‘장수각’이라는 식당을 동업으로 경영하다가 2020년 8월 서울 강서구 마곡에 ‘안영자면옥’이라는 자신의 이름을 내건 식당을 개업했다.

서울 강서구 마곡동에 낸 안영자면옥 내외부 모습. 2018년 북한 음식으로 받은 조리명인 자격과 안영자면옥의 평양냉면.


#탈북 요리사의 꿈

안영자면옥은 평양냉면을 기본 메뉴로 하고, 그외 여러 음식을 곁들인다. ‘돼지발쪽양념장찜’이라는 그녀의 고유 메뉴도 여기에서만 먹을 수 있다.

평양냉면 만드는 방법은 어디서 배웠냐고 묻자 “예전 군에서 요리사 교육을 받을 때 냉면 만드는 방법도 당연히 배우고, 옥류관에도 보름동안 실습을 갔다 오기도 했다”고 대답했다.

“서울에선 옥류관 냉면 맛을 만들 수가 없어요. 재료가 벌써 다르거든요. 비슷하게 만들려면 물냉면 한 그릇 가격을 지금보다 두 배 더 받아야 하는데, 그럼 팔리지 않아요.”

제일 자신 있는 북한 요리가 무엇이냐고 묻자 ‘추포탕’이라는 처음 들어보는 요리 이름을 말했다. 1년 미만의 소 애기집으로 만드는 요리라고 한다.

북한에서 그런 귀한 재료를 가려서 쓰냐고 묻자 그는 “북한 최고위급 간부들이 먹는 재료는 한국과 비교할 수 없이 좋은 재료를 쓴다”고 했다. 대다수 인민들은 옥수수밥도 없어 먹지 못하지만, 극소수 특권층은 재료의 미세한 맛까지 가려 먹는다는 것.

한국 음식과 북한 음식의 차이를 묻자 그는 “한국 요리는 재료 맛을 잘 살리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 달고, 맵고, 차고 이런 강한 맛이 위주인데 북한은 재료 맛을 그대로 살리는 데 특화돼 있다. 대신 북한은 전통 밖에 쓸만한 것이 없지만, 현대 요리와 음식 문화의 다양성은 북한이 절대 한국을 따라갈 수가 없다”고 대답했다.

그가 문을 연 안영자면옥은 알음알음 입소문을 거쳐 찾아온 손님들 덕분에 코로나 와중에도 적자를 보지 않고 살아남았다. 그는 조만간 강남에 2호점을 낼 꿈도 가지고 있다.

성공한 사업가가 꿈이냐고 묻자 그녀는 손사래를 쳤다.

“탈북자 이미지를 가지고는 대박을 쳐도 무섭고, 장사가 안돼도 무서워요. 적당하게 가계 월세 내고 직원들 월급을 주고 남은 것으로 내가 먹고 살 수만 있으면 만족입니다.”

정작 그녀의 꿈은 북에서 온 탈북민 중에 요리에 재능이 있는 사람을 찾아 요리사로 키우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자신이 나이가 들어 은퇴한 뒤에도 북한 요리 방법이 계속 전수돼 한국에서 또 하나의 음식 문화로 자리 잡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이제 어엿한 식당 사장도 됐고, 음식점도 잘 자리 잡았으니 행복한 인생이 아니냐고 하자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고 살아온 인생을 돌아보는 듯,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리곤 힘들게 입을 열었다.

“평생 편안한 때가 없이 힘들었어요. 북에서도 힘들었고, 한국에 와서도 너무 힘들었고, 지금도 힘들어요.”

철없던 시절 아버지 때문에 시작한 요리사라는 굴레는 전혀 다른 체제에 와서도 여전히 그녀의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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