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년 전에도 나왔던 그 말 "저지대에서 반지하 금지"
현재도 저렴한 임대료로 도시 빈민 주택으로 활용
서울시, 1998·2001·2010년에도 '반지하 규제' 밝혀
'반지하(Banjiha)'란 표현은 이제 친숙하다.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작인 영화 '기생충'에서 나온 주인공 일가의 터전도 반지하였다. 특히 반지하에서 거주 일가족이 물을 퍼내는 영화 속 장면은 인상적으로 그려졌다. 영국 BBC방송은 지난 8일 폭우로 반지하가 침수돼 사망한 일가족의 소식을 전하면서 "현실의 결말은 더 최악이었다"고 전했다.
수도권 주택 부족을 해소하기 위해 1970년대부터 급격히 확산한 반지하는 아직까지도 도시 저소득층 주거를 대변하는 표상 중 하나로 꼽힌다. 하지만 평시에도 거주자 건강을 위협하는 데다, 침수 같은 재난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는 점 때문에 정부에서는 끊임없이 거주지로서 반지하를 지양하겠다는 대책을 내 왔다. 반지하 주택을 없애 나가겠다는 10일 서울시의 발표는 외려 새삼스러울 정도다.
주택 지하층은 원래 공습 대비용이었다
본래 한국에서는 지하층의 주택 활용이 금지돼 있었다. 1962년 제정된 건축법에서 주택의 거실을 지층(地層, 당시 지하층을 부르는 표현)에 설치하는 것을 금지해 거주지의 지하 설치를 봉쇄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지하층 주택이 등장해 늘어나게 된 것은 1970년 건축법으로 제정된 '주택 지하층 설치 의무화' 규정 때문이다. 당시 남북관계가 일촉즉발로 치닫자 주택에도 지하 대피소가 필요하다는 인식 때문에 건축법을 개정한 것인데, 이때 형성된 지하공간은 당시 거주지 부족으로 인해 공공연하게 저렴한 셋방으로 활용되었다.
결국 정부도 주택 부족의 현실을 인정하고 1975년 지하층에 거실 설치를 금지하는 조항을 삭제해 사실상 지하층의 주택 전용을 허용했다. 1984년에는 다세대주택과 단독주택에서 지하층이 지상으로 노출될 수 있는 높이를 3분의 1에서 2분의 1로 완화했다. 지하층 거주자의 거주 여건을 개선하기 위한 규정이었지만, 그야말로 2분의 1, 즉 '반'지하가 된 주택의 공급을 확대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침수 참사 때마다 나온 '반지하 막겠다' 정책
1990년대 초까지 수도권에서 폭증하던 지하층 주거는 집중호우로 인해 침수 피해를 입은 사실이 부각되면서 규제의 대상으로 떠오르게 됐다.
1998년건설교통부(현재의 국토교통부)와 서울시는 상습 침수지역 피해의 70∼80%가 지하 또는 반지하 가구로 조사됐다면서, 침수피해가 잦은 지역을 '재해위험지구'로 지정하고 지하 또는 반지하 주택의 신축을 금지시켰다. 대신 높이 제한 완화 인센티브를 부여해 한 층 더 올리는 것을 허용하겠다고 발표했다. 1999년에는 건축법에서 규정된 주택 지하층 의무 설치 규정이 완전히 폐지됐다.
2001년 집중호우 이후 발생한 가로등 감전사고로 20여 명의 사망 사건이 발생하자, 서울시와 경기도가 재해위험구역의 지하 주택 신축을 금지하고 기존 지하 주택은 주차장 등 다른 용도로 활용하게 해 반지하 주택 감소까지 유도하겠다는 정책을 발표했다.
2010년 집중호우로 발생한 추석 물난리 때 침수 피해의 90%가 반지하 주택으로 집계되자, 서울시는 또 반지하 제한 방안을 냈다. 침수지역의 반지하주택 건축 허가를 제한할 수 있도록 법 개정에 나섰고, 이를 반영해 2012년에 건축법이 개정됐다. 단 기존 반지하 주택 철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예방 및 대응을 위한 지원방안을 내는 선에 그쳤다.
2020년엔 영화 '기생충'이 반지하에 대한 사회적 주목을 높였다. 국토교통부가 그해 3월 주거복지협의회를 통해 발표한 '주거복지로드맵 2.0'은 반지하 가구를 여건에 관계없이 무조건 최저 주거기준 미달 가구로 간주하고 공공임대주택 이주 지원대상으로 삼도록 했다. 이때 반지하 주택은 이주 지원이 시급한 가구를 파악하기 위한 전수조사 대상으로도 포함됐지만 코로나19 확산 등으로 인해 조사가 제대로 시행되지는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많이 줄었지만, 여전히 도시 빈민 거주의 상징
반지하를 억제하는 정책 발표가 지속되면서 전체 반지하 가구수는 감소 추세다. 통계청의 2020 인구주택총조사에 따르면, 전국 총 32만7,000가구가 반지하를 포함한 지하에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같은 조사에선 2005년 58만7,000가구, 2010년 51만8,000가구, 2015년 36만4,000가구로 집계, 감소 경향은 이어졌다.
현재 수도권에서는 건축위원회가 개입해 반지하 또는 지하의 주택 건축을 불허할 수 있다. 게다가 2000년대부터 주차 공간 부족을 해소하기 위해 필로티(기둥) 구조를 이용해 1층을 터놓고 건설하는 것이 유행하면서 '새 반지하'의 공급은 두드러지지 않고 있다.
하지만 반지하 가구에서 신축 주택이 줄어든다는 것은 현재 남아 있는 반지하 가구가 그만큼 노후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더구나 지하 또는 반지하 주택은 대체로 임대료가 지상 대비 3분의 1 수준이어서 저소득계층, 1인 가구, 청소년가구 등이 반지하에 머물고 있는 추세다.
2020년 한국도시연구소에서 발행한 서울 반지하 가구 실태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전국 반지하 가구의 95.8%는 수도권에 집중돼 있다. 수도권이 아닌 지역에 반지하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일명 '지옥고(지하·옥상·고시원)' 중에서도 지하는 수도권이라는 입지적인 이점이 없이는 주거공간으로서 성립할 수 없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또 같은 조사에서 서울 반지하 가구 중 기초생활수급가구는 29.4%, 소득 100만 원 미만 가구는 23%로 나타났다. 2020년 도시 빈민의 거주 형태로 반지하가 여전히 활용돼고 있음을 뜻한다.
"반지하 살면 안 좋은 건 알지만...갈 곳이 없다"
2020년 '기생충' 성공 때 쏟아진 여러 반지하 실태 조사 보고서는 모두 반지하 주거가 거주자에게 부정적이라는 데 이견이 없다. 어두워 우울감을 유발하는 데다 건강까지 해치는 공간이라는 지적이다. 조원철 연세대 토목공학과 명예교수는 지난 10일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와의 인터뷰에서 "반지하 공간은 환기가 안 되고 습기 제거를 못 하니까 위생상으로도 굉장히 나쁘고, 그래서 거주자들에게 호흡기계통 질환과 피부계통 질환이 많이 발생한다"고 지적했다.
게다가 반지하는 저층 주택과 함께 대표적으로 '관음증' 범죄에 취약한 공간으로 꼽힌다. 또 침수시에는 물이, 화재시에는 연기가 빠지지 않아 안전사고에도 더욱 위험하다.김진유 경기대 교수는 2021년 전한 본보 기고에서 "단기적으로는 반지하 주택에 단열설비와 환기 시스템을 갖추게 하고, 장기적으로는 반지하 주거를 퇴출시켜야 한다"고 조언했다.
반지하 문제는 결국 기존의 반지하 주거 공간을 없애는 방법에 대한 문제로 귀결되고, 현재 반지하 거주자는 어디로 가야 하느냐는 문제가 자연스레 따라온다. 이들에게 현재 반지하와 거의 동등한 수준으로 저렴하면서도 '살 만한' 주거 공간이 있어야 하는데, 특히 수도권 도심에서 이런 대안을 찾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최은영 한국도시연구소장은 지난 10일 TBS 라디오 '신장식의 신장개업'에 출연해 "현재 주거 급여 지원은 1인 가구 기준으로 32만 원 정도인데, 그 돈으로 갈 수 있는 건 고시원, 쪽방, 지하, 이렇게 되는 것"이라면서 "주택 공급을 늘리는 것과 별도로 열악한 환경에서 거주하는 이들에 대한 주거 복지라는 측면에서 정부가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분석했다.
윤성노 전국세입자협회 주거상담팀장은 지난 11일 YTN 라디오 '이재윤의 뉴스 정면승부'에서 "만시지탄이지만 폭우로 인해 반지하 주거를 없애 나간다는 정책 발표는 긍정적으로 본다"면서도 반지하를 비롯해 기존 '지·옥·고' 거주자들을 위해 "공공임대주택을 최대한 빨리 확보하는 공급 방안을 더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인현우 기자 inhyw@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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