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일기] 도덕적 허세는 진보적 좌파의 것?

장정일 입력 2022. 8. 14. 0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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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의 독서일기] 〈그랜드스탠딩〉
저스틴 토시·브랜던 웜키 지음
김미덕 옮김, 오월의봄 펴냄
ⓒ이지영 그림

저스틴 토시와 브랜던 웜키가 쓴 〈그랜드스탠딩〉(오월의봄, 2022)은 미국 이야기이지만 한국 이야기를 하는 것 같다. 그랜드스탠딩(grandstanding)은 ‘사람의 눈길을 끌어 인기를 노리는 행위’라는 뜻으로, 미국에서는 오래전인 1888년부터 야구 경기를 해설하면서 사용해왔다. 불가능한 공을 잡아챈 수비수가 공을 잡고 나서 과시하듯이 바닥에 몸을 구르는 행위가 바로 그랜드스탠딩이다. 하필이면 특별관람석(grandstand)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길 요량으로 그랬기 때문에 그와 같은 말이 만들어졌다. 야구팬들에게 미안한 말이지만, 이 용어 설명을 끝으로 야구 이야기는 더 나오지 않습니다. 지은이들이 이 책에서 다루는 과시적 행동은 ‘도덕적 그랜드스탠딩(moral grandstanding)’이니까요.

마침맞게 제기된 도덕적 문제 제기는 그것을 숙고하는 개인과 사회를 발전시킨다. 그러나 ‘도덕적 허세’는 아무런 사회적 성취도 이룩하지 못하죠. 예컨대 사회관계망 서비스(SNS)에 게시된 “경상도 사람들은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사회적 권세 때문에 사투리를 고치지 않는다”라는 글과, 그 글 밑에 고해성사하듯 달린 “그래서 저는 노력 끝에 사투리를 고쳤어요”라는 댓글들이 그렇다. 없애야 할 것은 동서 지역갈등에서 이득이 생겨나는 구조와 그것을 조장하는 세력이지 사투리가 아니죠. “그랜드스탠더는 도덕적으로 훌륭하게 보이길 열망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도덕적으로 문제가 없다고 (정확하게) 본 사안들을 도덕적 문제로 몹시 규정하고 싶어 한다.”

한국에서 그렇듯이 미국에서도 도덕적 허세는 진보적 좌파의 전유물로 알려져 있죠. 그래서 지은이들은 “그랜드스탠딩의 책임이 가장 큰 건 아마도 좌파 쪽일 것이라는 대중적인 짐작 탓에 좌파의 개탄스러운 정치 상황에 대한 한탄을 기대하며 이 책을 고른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라고 썼다. 정책이나 비전이 아니라 도덕적 허세로 명성을 얻으려는 이들은 좌파나 우파, 어디에든 있죠. 미국의 공화당과 보수주의 세력은 그 어떤 정치 논제든 도덕화시키지 않은 것이 없었고, 그 배후에는 기독교 근본주의가 있다. 그런데 도덕을 앞세워 명성과 지배력을 휘두르게 된 목사 가운데 성매매와 동성애로 몰락한 목사가 여럿이죠. 한국은 어떨까? 도덕적 허세는 도덕적 분노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조두순이 출소한 구치소 앞에서 소란을 떤 유튜버들은 이 시대가 대중적인 그랜드스탠딩의 시대라고 말해준다.

정치적 올바름과 도덕적 과시

장슬기의 〈그런 말은 전혀 괜찮지 않습니다〉(아를, 2022)는 좋은 사회와 좋은 말은 하나라고 말한다. 여성·성소수자·청소년·장애인·이주민· 지역·동물 등에 대한 차별은 법적·제도적으로 뒷받침되고 있기도 하지만, 이들이 일상적으로 마주하는 것은 언어적 모멸이죠. 우리가 뜻이나 어원을 모르는 채 쉽게 쓰는 말들이 이들의 존재를 부정하는 말일 수 있다. 흔히 민주주의 사회를 ‘국민이 주인인 사회’라고 정의하고 있지만 지은이는 “우리가 이 사회를 민주주의의 사회라고 느낄 때는 상대의 아픔을 가볍게 여기지 않고 진지하게 공감할 때”라고 재정의한다.

좋은 말이 좋은 사회의 바탕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은 1970년대 미국에서 시작된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의 목표와 다르지 않다. 하지만 1990년대 중반에 한국에 처음으로 도입된 이 운동은 언제부터인가 ‘PC충’이라는 조롱 섞인 저주를 받게 되었죠. 이 운동이 도덕적 과시의 형태로 소비되고 정파적인 무기로 협소하게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제20대 대통령 선거 때,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는 장애인을 두고 ‘장애우’, 비장애인을 ‘정상인’이라고 잘못 사용한 것 때문에 곤욕을 치렀죠. 자신의 가족이나 주위에 장애인이 없다면, 모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다문화가족을 접해보지 못했거나 거기에 대해 생각할 겨를이 없어서 ‘다문화맹(盲)’이 되듯이, 새로 생겨나고 바뀌는 용어를 학습하듯 하지 않으면 ‘용어맹(盲)’이 된다. 친절히 가르쳐주는 것과 비난하며 지도하는 것은 다르다. 시시각각 변해가는 세계 속에서 우리가 이미 알고 있던 것은 점점 협소해진다. 〈그런 말은 전혀 괜찮지 않습니다〉가 필요한 이유다.

사회인류학자 로이 리처드 그린커는 〈정상은 없다〉(메멘토, 2022)에서 산업혁명기 이후 유럽과 미국에서 정신질환은 공공연한 사회적 배제의 표시인 낙인과 하나로 엮여 내려왔다고 말한다. 정신질환은 자기통제와 자율성이라는 근대적 이상을 위협하기 때문에 무섭고 부끄러운 것으로 간주되고 있으며 실제로 따돌림, 공격 그리고 일자리나 주거지를 비롯한 많은 기회를 박탈당하기도 하죠. 이 때문에 미국에서는 정신질환을 가진 사람의 60%가 관리를 기피하고 있으며, 정신병 발병부터 첫 치료까지 평균적으로 걸리는 시간이 74주나 됩니다.

정신질환이 순전히 개인적이고 범주적(각 질병이 뚜렷이 구별되며 이상행동과 정상행동이 구분된다는 관점)인 것 같지만, 규정하기에 따라 얼마든지 사회적이고 차원적(이상행동과 정상행동을 정도의 차이로 보는 관점)으로 다룰 수도 있다. 다시 말해 정신질환을 어떻게 취급하느냐에 따라서 사회적 낙인의 효과를 낮출 수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전직 군인이나 비밀 요원이 단골 주인공인 할리우드 액션 영화에 빠지지 않고 나오는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랍니다. 이 장애는 제1차 세계대전 때 처음 등장했는데, 고통을 호소하는 병사들은 사지마비나 일시적인 청각과 시각 상실, 불면증·현기증 등의 증세를 보였죠. 의사들은 이 증상에 히스테리라는 진단을 내렸는데, 이 진단을 받은 병사들은 ‘꾀병 환자’, ‘남성답지 못한 겁보’라는 주위의 낙인에 시달렸다. 그때까지 히스테리는 감정 조절을 할 수 없는 여성들에게만 발병한다고 보았다. 이 때문에 제2차 세계대전 때 군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군진 정신의학자들은 인도주의적인 의도에서 이들에게 PTSD라는 새로운 정신질환 범주를 만들고 병명도 새로 지어주었다. 그러고 나자 PTSD는 애국적인 남자만 갖게 되는 자랑스러운 정신질환이 되었죠(적어도 숨길 필요가 없는 정신질환이 되었다).

문화가 낙인과 정신질환을 함께 묶었다면 이제 그 둘을 분리할 수도 있다. “사람들의 다름이 질병이나 장애가 되는 경우는 대개 사회가 그렇게 만들 때뿐이다. 계단을 대신하는 경사로나 승강기가 없을 때만 휠체어 사용자가 ‘장애인’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장정일 (소설가)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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