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진 모래성, 스테이블 코인은 존재해야 하는가
주식시장에 유혈이 낭자하다. 코인 시장 역시 마찬가지다. 암호화폐 정보 웹사이트인 코인마켓캡에 따르면 올해 초 2조2500억 달러였던 글로벌 암호화폐 시가총액은 7월8일 현재 9700억 달러까지 줄어들었다( 〈그림 1〉 참조). 40여 년 만에 찾아온 인플레이션과의 전쟁으로 미국 연방준비제도(Fed)가 금리를 공격적으로 올리고 있고, 한동안 이 같은 움직임이 계속될 것이라는 예측은 암호화폐(코인)들의 가치 하락을 부채질했다. 위험자산 회피 심리가 치솟았고, 특히 5월 중순 테라·루나 사태 이후엔 가상자산 시장에 대한 신뢰도가 하락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코인 값이 급락하자 가상자산 거래와 관련된 디파이(DeFi·탈중앙화된 금융) 업체들 또한 줄줄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 가상자산 중개·대출 업체인 보이저디지털(Voyager Digital)이 고객들의 급증한 자금 인출 요구(런)에 직면해 결국 이달 초 파산보호를 신청했다. ‘런’이 일어난 이유는 헤지펀드 쓰리애로우스캐피털(3AC)이 보이저디지털로부터 빌린 6억5000만 달러에 대해 디폴트(채무불이행)를 선언했기 때문이다. 빌린 돈 대부분을 가상자산에 투자해 날린 탓이다. 7월5일에는 싱가포르에 본사를 둔 볼드(Vauld) 역시 예금 인출을 중단하고 법원에 모라토리엄(지급유예)을 신청하겠다고 발표했다. 고객들의 인출 규모가 6월 중순 이후에만 2억 달러에 이르러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이에 앞서서는 역시 가상자산 대부업체인 셀시우스(Celsius)와 바벨파이낸스(Babel Finance)가 자금 인출을 중단한 바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의 게오르기에바 총재는 지난 5월 다보스포럼에서 자산으로 뒷받침되지 않은 스테이블 코인은 그저 곧 무너져 내릴 피라미드일 뿐이라며 그 위험성을 경고한 바 있다.
‘가짜 탈중앙’ 스테이블 코인
문제는 자산시장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어 위기를 증폭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주식시장과 암호화폐 시장을 따로따로 볼 것이 아니란 얘기다. 어느 한 시장에서 일어난 위기가 다른 시장으로 전이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위기는 시스템 위험에 따른 결과일 가능성이 크다. 시스템 위험(systemic risk)은 총체적인 금융 기능 마비를 불러올 수 있는 재앙적 위기를 말한다. 우리는 이미 2008년에 겪었다. 그 교훈에 따라 금융위기 이후 시스템 위험을 예측·축소·통제하기 위한 수많은 장치가 입안되었다. 거대 투자은행의 경우 민간기업이라 하더라도 ‘시스템적으로 중요한 금융기관(SIFI)’으로 지정해 연방정부의 규제를 받도록 강제한 것은 그 예 중 하나다. 일종의 중앙 통제장치인 셈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탈중앙화’를 기본으로 출발한 디파이라면 어떨까? 이를 ‘중앙’에서 규제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이런 식의 규제는 디파이의 성립 기반 자체에 대한 부정이 되는 게 아닐까?
스테이블 코인은 탈중앙화된 금융시스템인 디파이를 기반으로 하지만 실제 탈중앙화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탈중앙화가 아닌, 아니 그렇게 될 수가 없어 ‘가짜 탈중앙(Fake-DeFi)’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이유로는 보통 다음과 같은 것들이 제시된다. 우선 개발자는 프로그램 코드를 수정할 수 있는 어떤 키(key)를 보유한다는 점이다. 이는 다른 코인 사용자들이 가질 수 없는, 오직 개발자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이다. 게다가 개발자는 아예 블록체인을 개발할 당시부터 자신에게 더 많은 거버넌스 토큰(의사결정에 참여할 권한이 부여된 암호화폐)이 주어지도록 설계함으로써 자신이 시스템 운영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도록 만들 수 있다. 투표를 통한 의사결정 시스템이라 하더라도 소수에게 권력이 집중될 가능성이 열려 있는 것이다. 더구나 거버넌스란 본질적으로 권력을 누구에게 배분할 것인가의 문제다. 필연적으로 ‘중앙화’의 개념을 내포할 수밖에 없다. 어떤 프로그램도 처음부터 완벽하게 만들어질 수는 없으므로 알고리즘의 불완전성은 결국 어떤 형태로든 집중화를 통해 극복해야 한다. 실제로 테라·루나 사태가 터졌을 때 투자자들은 누구나 테라폼랩스의 공동 창업자인 권도형 대표를 비난하지 않았는가 말이다.
만약 어떤 스테이블 코인의 가치가 미국채에 연동(peg)되어 있다면 이미 태생적으로 ‘집중형’ 스테이블 코인이라고 볼 수 있다. 전통적인 중앙집중형 금융(centralized finance·CeFi)에서 탈피하는 것이 디파이의 핵심이지만 미국채와 연계함으로써 경제 금융의 핵심적 ‘중앙’인 미국 재무부를 더하고 만 셈이니 말이다. 또 지난 칼럼에서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스테이블 코인 가치가 떨어져 미국채와 대등하게 교환할 수 없게 될 가능성이 커지는 경우 맞닥뜨리게 될 ‘런’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예금보험과 같은 중앙정부의 백업이 필요하다(〈시사IN〉 제770호 ‘민간에서 발행한 화폐가 위험한 진짜 이유’ 기사 참조).
탈중앙화의 허구성은 블록체인의 가장 기본적인 토대인 데이터 축적 경로에서부터 나타날 수 있다. ‘오라클(Oracle)’은 블록체인에 올려지기 이전 데이터를 모으는 메커니즘을 말한다. 블록체인의 스마트 계약(smart contract)이 작동하는 가장 기본이 역시 정보의 흐름, 즉 데이터라는 점에서 중앙화되어 있는 오라클은 그 자체로 디파이의 탈중앙화에 큰 걸림돌이 될 수 있다.
스테이블 코인이 생존하기 위해 ‘네트워크 효과’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테라·루나 백서’의 초록만 읽어봐도 알 수 있다. 좀 더 많은 이용자를 모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새로운 투자자들이 계속해서 루나를 매입해주지 않으면 테라의 가치를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없다. ‘폰지적 성격’이라는 비난이 따라 나오는 이유다.
알고리즘 스테이블 코인의 또 다른 중요한 문제점은 투기 공격에 취약하다는 것이다. 특히 담보가 부족할 경우에 그렇다. 비트코인 리저브가 부족하다거나, 루나가 테라에 비해 부족했을 때 투기 세력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네트워크 효과와 투기 공격에 대한 취약성으로 인해 디파이는 기존 비디지털 금융시스템의 안정성조차 위협할 수 있다. 그리고 높은 수준의 부채, 유동성 부조화, 디파이 간 연결성, 경제적 충격을 완충시킬 수 있는 장치의 부재 등은 그 위협을 키운다. 이를 하나씩 살펴보자.
디파이는 전통적인 파이낸스와 마찬가지로 돈을 빌리거나 빌려주는 거래를 하는 플랫폼이다. 실제 많은 거래가 빌려온 돈(레버리지)으로 이루어지는데, 담보가치의 몇 배까지 거래 규모를 키울 수 있다. 빌려온 돈을 또 다른 거래의 담보로 이용해 추가로 돈을 빌리면 애초에 주어진 담보가치를 훨씬 넘어서는 큰 포지션을 잡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레버리지가 ‘경기 순응성(procyclicality)’을 증대시킨다는 사실이다. 만약 담보가치가 하락해 계좌 총액이 최소 충족 요건에 미치지 못할 경우에는 자신이 가진 자산을 헐값에라도 팔아(반대매매) 부족한 금액을 메워야 한다. 그런데 이런 일은 특히 경기 하락 시에 많이 벌어진다. 아무래도 경기가 좋지 않을 때 담보가치가 떨어지기 쉽기 때문이다. 그리고 반대매매는 가격 하락을 부추길 가능성이 크다. 결국 나쁜 경기에 순응해 코인 가격도 떨어지는 셈이다. 이와 같은 과정은 전통적인 파이낸스에서 이미 수없이 경험해왔다. 디지털 경제라고 해서 다를 게 없다.
수많은 디파이 플랫폼들은 ‘태생적으로’ 서로 얽혀 있다. 이로 인해 시스템 안전성은 위협받을 가능성이 크다. 예를 들어보자. 하나의 디파이 플랫폼에서 빌린 암호화폐를 또 다른 디파이 플랫폼에 예치해 이자를 버는 ‘스테이킹(staking)’은 디파이 업체들의 주요한 사업 방식 중 하나다. 돈을 빌려 다른 디파이 업체에 빌려준다. 이와 같은 사업 방식은 서로 비슷한 예금 이자율을 제공하는 기존 은행들에서는 볼 수 없었던 방식이다(두 은행의 이자율이 비슷할 때 단순히 KB은행에 예치하기 위해 하나은행에서 돈을 빌리는 사람은 없다). 돈을 빌리는 이유는 별다른 것이 없다. 그냥 다른 디파이 업체에 빌려주기 위해서다. 게다가 이렇게 돈을 빌리고 빌려주는 거래는 다른 전통적 예금 거래와는 달리 어떤 보험으로도 보호되지 않으며 규제에서도 한참 벗어나 있다. 위험이 큰 거래라는 뜻이다.
스테이블 코인의 ‘런’ 문제
돈을 빌리고 빌려줄 때 유동성 미스매치(liquidity mismatch)도 문제다. 빌린 돈을 유동성이 낮은, 다시 말해 ‘현금화하는 데 시간이 걸리는’ 금융상품들에 투자한 경우라면 말이다. 게다가 기업어음 등 유동성이 낮은 단기 금융상품에 연동되어 있는 코인들의 경우에는 태생적으로 유동성이 문제가 될 수 있다. 화폐가치를 유지하기 위해 담보 수준을 조정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변동성이 큰 담보를 기반으로 한 경우 시장 위험(market risk)에도 노출된다. 담보가치 하락에 따라 코인 가치도 하락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동성 미스매치와 시장위험에 대한 노출은 ‘런’ 위험을 증대시킨다. 그리고 유동성이 떨어질 경우, 런 요구에 적시 대응이 어려워진다. 그리고 유동성은 설상가상으로 경기가 좋지 않을 때 더 큰 문제가 된다.
스테이블 코인의 ‘런’ 문제는 시스템 위험이 될 수 있다. 대형 시중은행이 암호자산에 투자한다거나 디파이에서 자금을 조달하는 등 비디지털 금융시스템과 디파이의 연계가 얇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스테이블 코인에서 발생하는 ‘런’은 머니마켓 뮤추얼펀드(MMF)에서 그것이 발생하는 경우처럼 은행권에 쇼크가 될 수 있다. 전통적인 금융시스템으로 위험이 전이되는 것이다. 위험의 전이를 막기 위해서라도 암호화폐 시장의 위험을 규제해야 할 필요성이 커진다.
스테이블 코인을 규제할 때 반드시 고려해야 하는 것이 트릴레마(Trillemma)다. 어떤 스테이블 코인이든 ‘탈중앙화’ ‘안정성’ 그리고 ‘효율성’ 세 가지 중 하나는 반드시 포기해야만 한다는 것이 그 내용이다(〈그림 2〉 참조). 여기서 안정성(stability)은 스테이블 코인의 가치가 얼마나 안정적이냐를 말한다. 특히 미국채 등 담보자산과 연동을 얼마나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느냐 하는 것으로 변동성이 심한 시장에서 더욱 중요시된다. 효율성(capital efficiency)은 코인 가치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자금이 필요한지를 나타내는 개념이다. 트릴레마에 따르면, 만약 어느 스테이블 코인이 적정한 수준의 자금을 투입해(높은 효율성) 미국채와의 연동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다면(안정성이 높다), 그 코인은 탈중앙화된 코인일 수가 없다.
최근 일련의 스테이블 코인 사태는 트릴레마와 관련해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사고가 많다 보니 아무래도 안정성과 효율성에 방점이 찍히는 것이다. 권도형 테라폼랩스 대표 스스로도 ‘탈중앙화 경제는 당연히 탈중앙화된 화폐를 필요로 하지만 테라는 그 역할을 하기에는 너무 많이 신뢰를 잃었다’는 내용의 포스팅을 회사 블로그에 올렸다. 디파이가 전통적인 금융시스템과 닮아 있다는 점은 ‘같은 위험에는 같은 규제를 적용한다’는 원칙하에 이미 존재하는 금융 규제 시스템을 디파이에도 적용할 여지가 있음을 알려준다. 전통적인 금융시스템은 ‘중앙’에 의한 통제 시스템이 갖춰져 있는 체계다. 사실 ‘중앙화’되어 있지 않은 걸 규제한다는 것은 몹시 어려운 일이다. 문제가 생겼을 때 책임 소재를 가려내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책임에서 자유로우면 당연히 도덕적 해이가 생긴다.
스테이블 코인 규제의 필요성에 대한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높다. 미국에서는 스테이블 코인이 연방 차원에서 규제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 국회가 시급히 나서야 한다는 보고서가 이미 지난해 말에 나왔다. 보고서는 예금보험공사(FDIC)에 의해 보호받는 발행자만이 스테이블 코인을 발행할 수 있도록 하며 이 발행자들은 ‘은행’으로 분류해 국가적 감시(federal oversight) 아래에 두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는 스테이블 코인을 ‘안정적’으로 만들기 위해 사실상 국가, 즉 ‘중앙’이 개입하겠다는 뜻이다(‘탈중앙’의 포기). 이러한 규제안들은 사실상 ‘민간 화폐’로서의 스테이블 코인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스테이블 코인 규제와 관련해 아예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 발행을 대안으로 제시하는 의견이 많은 이유도 그 연장선에 있다.
규제 발걸음이 활발하지만 아예 스테이블 코인을 폐지하자는 의견도 있다. 올해 5월 〈파이낸셜타임스〉에 실린 아메리칸 대학의 힐러리 앨런 교수(법학)의 주장은 신랄하기 이를 데 없다. 그녀는 “우리가 지금 던져야 할 질문은 ‘어떻게 디파이 시장을 규제할 것인가’가 아니라 ‘스테이블 코인이 과연 존재해야 하는가’이다”라고 말한다. 투기자들의 돈놀이 수단으로 전락하고, 채굴로 인한 환경문제나 만들어내면서 급기야 금융시스템까지 위협하는 암호화폐 따위가 누구의 행복을 위해 존재하느냐는 것이다. 이에 대해 누군가는 아기를 씻기고 나면 양동이의 물만 버려야지, 그 물로 목욕시키던 아기까지 버리면 안 된다고 얘기하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이 신랄한 비판의 울림은 크다.
누군가 돈을 빌린다면 그건 어딘가에 투자하기 위해서다. 집을 짓기 위해서, 또는 더 좋은 물건을 만들 공장을 짓거나 판매하기 위해서 등등. 그러나 디파이의 경우 돈을 빌리는 이유는 단순히 다른 디파이에 돈을 빌려주기 위해서다. 그리고 이런 메커니즘은 오직 암호화폐의 가치가 끊임없이 상승할 때에만 유효하다. 이런 투기판조차도 실물경제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게 아니냐고 묻고 싶은 사람들에게 〈월스트리트저널〉의 존 신드루 기자는 다음과 같이 간단히 응수한다. 17세기 네덜란드에서 버블이 한참 끼어 있던 튤립을 거래하던 상인들이 보트를 살 수 있었던 것은 사실이라고. 당연히, 이것을 실물경제에 어떤 보탬이 되었다는 근거로 얘기할 수는 없다.
2008년 금융위기를 가져온 건 많은 사람들이 주택시장에 기를 쓰고 투자해 버블이 생겼던 탓이다. 지금의 암호화폐 시장은 마치 그때의 주택시장처럼 보인다. 사실, 어쩌다 금융시장이 이 지경까지 왔는지 생각하면 한숨이 푹푹 나온다. 투자론 교과서들은 금융시장에서 ‘투기’와 ‘투자’는 그리 다르지 않으니 굳이 구분하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금융시장의 천박함에 단내가 나는 시점에 도달했다면 이제 깊이 생각해볼 일이다.
이관휘 (서울대 경영학과 교수)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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