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전채 구축효과로 은행 대출 창구로 내몰리는 대기업들..기재부·한은 '예의주시'

이재은 기자 2022. 8. 14. 06:01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한전, 14兆 적자 메우려 채권 발행
고금리 한전채로 자금 몰리면서 회사채 시장 냉각
자금조달 어려워진 기업, 은행 대출로 선회
7월 은행 기업대출 12조2000억원 늘어

올해 상반기에만 14조원이 넘는 적자를 낸 한국전력이 운영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회사채(한전채)를 대규모로 발행하면서 가뜩이나 발행 여건이 악화된 회사채 시장을 더 위축시키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AAA급 한전채가 4%에 육박하는 높은 금리에 시중에 대량으로 쏟아지면서 일반 기업이 발행하는 A급 이하 회사채는 투자자의 외면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회사채 직접발행을 통한 기업의 자금조달이 어려워지자, 기업의 은행 대출도 사상 최대로 늘었다.

전남 나주 혁신도시 한국전력 전경. / 뉴스1

◇ 회사채 시장 냉각…은행 대출창구 찾는 대기업

14일 한국은행에 따르면 기업이 은행에서 빌린 돈이 최근 큰 폭 증가했다. 은행의 기업대출은 지난달에만 12조2000억원 늘었는데, 7월 기준 증가폭은 관련 통계를 집계하기 시작한 2009년 이후 최대를 기록했다. 앞서 6월에도 기업대출은 6조원 확대됐다. 이 역시 6월 기준 역대 최대 증가폭이었다.

한국은행은 은행의 기업대출이 급증한 주된 이유로 회사채 시장 부진을 꼽았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를 비롯한 주요국의 공격적인 금리인상, 경기 침체 우려 등으로 금융시장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회사채 시장에는 찬바람이 불고 있다. 금융투자협회가 최근 발표한 ‘7월 장외채권시장 동향’에 따르면 지난달 회사채 발행액은 6조4000억원으로 전월보다 1조4690억원 감소했다. 지난 5월(-1조6282억원)과 6월(-1조1675억원)에 이어 3개월 연속 순상환을 기록했다.

그래픽=손민균

황영웅 한국은행 금융시장국 시장총괄팀 차장은 “최근 글로벌 금융시장 변동성 확대로 우리나라 금융시장도 영향을 받으면서 회사채 신용 스프레드(국고채와 회사채 간 금리 격차)가 확대됐다”며 “회사채 직접발행을 통한 기업의 자금조달이 어려워지면서 기업들이 은행 대출을 활용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 지난달 국고채와 회사채 간 금리 격차(스프레드)는 1%포인트에 육박한 것으로 나타났다. 3년물 기준 회사채(AA-)와 국고채 간 스프레드는 지난 6월 0.81%포인트에서 지난달 0.96%포인트로 벌어졌다. 기업의 실적 악화에 대한 시장의 우려가 커지면서 회사채의 투자 매력이 그만큼 떨어졌다는 의미다.

그래픽=손민균

◇ 한전, 14조 적자 메우려 채권 발행…회사채 시장 경색

채권시장과 투자은행(IB) 관계자들은 최근 회사채 시장이 위축된 데는 금융시장 불확실성과 시장금리 상승도 한몫했지만, 올해 23조원에 달하는 적자가 예상되는 한국전력이 자금 조달을 위해 연초부터 쏟아내고 있는 한전채의 영향이 컸다고 입을 모았다.

한전은 운영자금을 대부분 한전채로 조달한다. 특히 실적이 부진할수록 한전채 발행을 크게 늘리는 기조를 보인다. 한전은 올 상반기에만 14조3033억원의 영업손실을 기록했다. 역대 최대 규모의 적자다. 전기요금 인상이 국제유가, 액화천연가스(LNG) 등 연료비 인상폭을 따라가지 못한 결과다.

문제는 조 단위 적자를 낸 한전이 올 들어 공격적으로 한전채 발행에 나서면서 공급과잉에 따른 시장 왜곡이 나타나고 있다.

실제 한전채가 속한 국내 공사채 시장에서 한전의 비중은 올 들어 크게 높아졌다. 신영증권에 따르면 지난해 발행된 전체 공사·공단채 가운데 한전채의 비중은 약 10.7%였다. 그러나 이달 11일 기준 그 비중은 33.8%까지 확대됐다. 한전은 올해 1분기에만 지난해 한해 동안 발행한 금액(10조4300억원)에 맞먹는 9조7600억원 상당의 한전채를 발행했다. 이런 발행 순증 흐름이 이어지면서 이달 11일 기준 한전채 발행액은 19조3600억원까지 불어났다.

한전채 등 공사채는 정부가 지급 보증을 한다는 점에서 신용등급이 초우량에 해당하는 AAA급이다. 공사채는 안정성이 높은 만큼 일반 회사채보다 발행금리가 낮은 편인데, 한전채의 경우 올해 대량으로 시장에 풀리는 바람에 금리가 가파르게 상승했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한전채 3년물 민평금리는 지난 11일 기준 3.982%로 4%에 달했다. 5년물 금리는 4.039%로 4%를 넘어섰다.

한전채가 AAA급임에도 고금리로 발행되면서 대기업이 발행하는 더블A(AA급), A급 회사채는 물론 여전채 수요까지 구축하는 상황이다. 투자자 입장에서는 같은 가격이면 AA급 공사채나 회사채보다 안정성이 높은 초우량 한전채에 투자하는 게 유리하기 때문이다. 김상만 하나금융투자 연구원은 “채권투자 관점에서 보면 한전채 투자자들은 대한민국 정부의 신용보강을 담보로 한 채권에 대해 이른바 ‘무위험 차익거래’의 기회를 활용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국내 금융업계 한 관계자는 “한전채는 AAA급인데 발행이 급격히 늘면서 가격이 낮아지다 보니 AA급과 A급 회사채가 설 자리가 좁아지고 있다”며 “여기에 금리인상까지 맞물리면서 회사채 투자 수요가 위축됐고, 시중 자금이 기업 대신 한전에 몰리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회사채 발행시장이 냉각되면서 6월 이후 공모시장에서 A급 회사채 수요예측 미달이 잇따라 속출하고 있다.

그래픽=손민균

◇ 한전채 공급과잉 상당기간 지속…기재부·한은 ‘예의주시’

시장에서는 한전채의 공급과잉 문제가 단기간에 해결되기 어려울 것이라고 보고 있다. 한전이 대규모 적자에서 탈출하려면 국제유가 상승에 대응해 전기요금을 인상해야 하는데 정부가 물가 억제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어 당분간 적자를 메우기 위한 채권 발행 기조는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다만 채권 발행 한도에 따라 한전의 추가 자금 조달이 제한될 수 있다. 한국전력공사법에 따르면 채권 발행 한도는 공사 자본금과 적립금의 2배다. 한전의 채권 발행 한도는 지난해 말 기준 약 92조원이고, 최근까지 한도를 절반 정도 채웠다. 시장 전망대로 한전이 올해 23조원에 달하는 영업손실을 기록할 경우 자본금과 적립금이 쪼그라들어 내년 채권 발행 여력이 현재의 절반 수준으로 줄어들게 된다.

조용구 신영증권 연구원은 “한전이 최근 채권 발행한도 확대 계획을 내놓았는데 실제 한도가 늘어날 경우 한전채 공급과잉 국면도 상당 기간 이어질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한국은행과 기획재정부 등 채권시장을 관리하는 당국에서도 한전채 발행 확대로 인한 시장 왜곡 가능성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한전채 발행 확대가 전반적인 회사채 발행 금리를 높이는 요인으로 작용할 뿐만 아니라, 다른 기업들의 자금 조달을 어렵게 만들고, 결과적으로는 투자 등 실물 경제활동 애로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실제로 회사채 발행에 실패한 기업들이 대거 은행으로 몰려들면서 일부 은행들은 기업 대출에 대해 보수적인 태도로 대응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 시장 당국자는 “한전의 채권 발행 확대가 전반적인 시중금리 상승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고, 시장을 통한 자금 공급에 차질을 빚어지는 병목요인이 될 수 있어 예의주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 Copyright ⓒ 조선비즈 & Chosun.com -

Copyright © 조선비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