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킨을 계속 먹는 한, 비는 계속될 것이다[양다솔의 기지개 켜기](10)

2022. 8. 13. 0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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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가능한 휴가
나의 휴가 준비는 조금 특별하다. 휴가지는 늘 똑같다. 숙소도 매년 같다. 매년 그 시기만을 기다리냐면, 정확히 짚었다. 나는 이 시기를 위해 한해를 살았다. 시기는 늘 8월 초였으며 목적지는 정동진이라는 작은 바다마을이었다. 준비는 부엌에서 시작했다. 채수를 내어 집에 있는 온갖 채소를 넣고 김치 한포기와 청국장 한덩이 빠뜨려 푸지게 청국장을 끓인다. 엄마가 키워 보내준 가지를 들기름과 간장양념에 고소하게 찐다. 온갖 잡곡을 섞어 밥도 넉넉하게 지어둔다. 고구마, 감자, 옥수수를 찐다. 마트에서 소량으로 사기 어려운 재료들도 소분해 챙긴다. 국물을 낼 다시마와 고추장, 후추, 설탕, 양파다. 아침으로는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요거트와 그래놀라로 정했다. 두유로 만든 그릭요거트를 파는 가게를 찾아가 두유 요거트를 넉넉히 사고, 그래놀라 맛집도 들러 이틀 치를 구입하면 준비 완료다. 그렇게 드디어 출발 당일, 친구와 나는 2박3일 여행을 가는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짐을 끌고 나타났다. 서로를 바라보기만 해도 웃음이 났다.

양다솔 작가가 8월 초 휴가지인 정동진의 한 시골길에 서 있다. / 양다솔 제공


여름의 정답은 바다? 수박?

예보에서는 내내 비가 온다고 했는데 역에 도착하니 쨍하게 맑은 바다가 선물처럼 반겼다. 당장이라도 뛰어들고 싶었지만, 금강산도 식후경이다. 먼저 숙소로 들어섰다. 발코니로는 산이 보이고 창문으로는 바다가 보이는 방이었다. 식량부터 냉장고로 옮겼다. 둘이 가져온 간식을 한데 모으니 찬장이 가득 찼다. 점심은 친구가 끓여온 미역국으로 정했다. 잡곡밥과 가지찜을 데우고 상을 차린다. 한명이 상을 닦으면 한명은 음식을 담는데 손발이 착착 맞는다. 옛날에 집마다 있었던 붉은 납작다리 상을 바닥에 펼치고 수저를 가지런히 두고 준비된 상 앞에 마주 앉았다. 그 모습이 꼭 어디서 본 듯한 기시감이 들었다.

“우리 꼭 여름에 학교 갔다 와서 일하러 간 엄마 아빠 기다리는 자매 같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영화 같다.”

우리는 히히히 웃으며 그릇을 싹싹 비운다. 간식으로 쪄온 옥수수를 먹으며 수영복으로 갈아입는다. 튜브와 책을 들고 숙소를 뛰쳐나간다. 넓고 푸른 바다 위로 펼쳐진 하늘이 꼭 작품 같다. 햇빛이 너무 강렬해 모든 것이 당장이라도 타오를 것 같다. 물놀이하기 딱 좋은 날씨다. 모래사장에 발이 델 것 같이 뜨거워 깡충거리며 뭍으로 간다. 마음에 드는 장소에 자리까지 펴고 나면 이제 바다로 뛰어드는 일만 남았다. 바다로 달린다. 파도가 반갑게 맞받아치듯 온몸을 껴안는다. 소름이 끼칠 정도로 시원하다. 몸을 담그는 순간 세상 전체가 그늘처럼 선선해진다. 그것은 꼭 마법 같아 믿을 수가 없을 정도다. 마치 이렇게 더운 것은 어서 오라는 바다의 부름이었던 것만 같다. 여름의 정답은 바다였다.

아니, 정정한다. 여름의 정답은 수박이다. 바다의 마법에 걸려 더위를 잊은 우리는 물기도 털지 않고 수박을 사러간다. 커다란 수박을 끈에 매달아 사이좋게 둘러메고 먹기 좋게 자른다. 바다 앞에 마주 앉아 수박을 먹는다. 모래에 엎드려 책을 읽는다. 우려온 차도 호록호록 마신다. 다시 더워지면 바다에 들어간다. 그러다 제트스키를 가져온 아저씨를 발견하고는 달려가서 ‘한 번만 태워주세요’ 한다. 아저씨 뒤에 매달려 바다 저 멀리까지 크게 한바퀴 질주한다. 파도를 타고 하늘 위로 튀어오른다. 바다 안에서 보이는 정동진의 모래사장과 푸른 산들을 바라본다. 날아갈 듯 비명을 지른다. 감사 인사를 하고 자리로 돌아와 다시 수박을 먹는다. 책을 읽는다. 차를 마신다. 다시 바다에…. 이게 천국이 아니라면 무엇일까, 그런 생각을 한다. 이것이 사는 게 아니라면 무엇일까 하고.

해가 지고 숙소로 돌아가 샤워를 하고 라면을 끓여 먹었다. 물론 채식 라면이다. 물놀이 끝에 먹는 라면이 얼마나 맛있는지는 먹어본 사람만 안다. 국물에 밥까지 야무지게 말아 먹고 저녁의 옷으로 갈아입고선 초등학교로 향한다. 영화제가 시작할 시간이다. 마을 중앙에 있는 아기자기한 초등학교에서 매년 영화제가 열린 지도 올해로 24년째다. 운동장에 커다란 스크린이 설치되고 사람들이 운동장에 삼삼오오 돗자리와 의자를 펴고 앉아 영화를 본다. 이 시기, 이 조용한 시골 동네에서 가장 바쁜 곳은 치킨집이다. 사람들은 너도나도 영화를 보며 치킨을 먹겠다고 가게 앞에 줄을 섰다. 동네 가득 치킨 튀기는 냄새가 진동했다. 숙소마다 바비큐를 하는지 고기 굽는 냄새가 실려 왔다. 우리는 냄새를 피해 다녔다. 복숭아와 수박, 뻥튀기를 한아름 안고 영화를 보았다. 하늘을 올려다보면 별이 총총 떠 있었다. 옆으로는 산과 논이 펼쳐져 있고, 이따금 기차가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하품이 날 때쯤엔 숙소로 돌아와 잠이 들었다. 새벽이면 창문 밖으로 해 뜨는 바다가 보였다.

기후 재난, 육식이 부추긴다

다음날도, 그다음날도 일과는 비슷했다. 해가 뜨면 바다에 뛰어들었고, 수박과 복숭아를 먹었고, 책을 읽고, 모래사장 위에서 요가를 하다가 낮잠을 잤다. 다시 일어나 바다에 몸을 담갔다. 아침은 두유 요거트에 그래놀라를 말아먹었다. 오후까지 배가 기분 좋게 든든했다. 저녁엔 청국장과 가지찜을 먹고 다시 산책하러 가듯이 영화제로 향했다. 하루가 다르게 피부색이 진해지고 근심은 옅어졌다. 아침 바다에는 유난히 사람이 없었다. 고요하고 투명한 바다에서 우리의 발끝을 쫓아다니는 작은 물살이들을 보았다.

기차가 서울에 가까워지자 빗방울이 보이기 시작했다. 집에 갈 즈음엔 거세게 쏟아졌다. 방금까지 쨍하게 맑은 바다에 몸을 담갔던 게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쏟아지는 비는 멈출 줄을 몰랐다. 밤이 새도록 천둥과 번개가 쳤다. 여기저기서 안부 연락이 왔다. 비가 너무 많이 내려 다친 곳은 없냐는 거였다. 그 이야기를 묻는 동안에도 비는 그치지 않고 있었다. 5분만 걸어도 쫄딱 젖었다. 사흘간의 꿈같은 휴가는 까맣게 잊혔다. 비가 와 사람들이 죽었다. 서울 한복판에서 무릎까지 물이 차고, 다 큰 성인이 길을 걷다 맨홀에 빠져 실종됐고, 수천대의 차가 발이 묶였다. 뉴스를 보면서도 와닿지 않았다. 누가 지어낸 얘기 같았다. 비는 더 이상 날씨가 아니라 재앙이 되고 있었다. 지진이나 폭풍, 역병의 차원까지 갈 필요도 없었다. 우리의 일상은 어느새 너무나 달라져 있었다. 친구는 집에 산사태 비상령이 내려 언제든 집을 떠날 수 있는 비상 가방을 싸놨다고 했다. 불안한 마음에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서울은 이제 너무 위험해. 얼른 지방으로 가야 하는 게 아닐까?”

“이제 시작이야. 지방이라고 안전하다고 누가 말할 수 있어?”

말문이 막혀 답을 할 수가 없었다. 더 이상 희망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묘수를 가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최악의 상황에 대피할 만한 장소를 협의하고 전화를 끊었다. 전화의 끝에 친구가 말했다. “맨홀 조심하고.” 우리에게는 놀랄 일들만 남아 있었다. 뭐든지 이전과는 다를 것이다. 무섭게 덥고, 무섭게 춥고, 무섭게 가물고, 무섭게 내릴 것이다. 우리가 생각보다 많은 것에 속수무책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의 휴가가 올해로 마지막이 된다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비는 계속 내릴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치킨을 먹든, 먹지 않든 비는 계속 내릴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우리가 치킨을 계속 먹는 한, 비는 계속될 것이다.

양다솔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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