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가 우리를 구원할 것이다" 스스로 인문학을 향유하는 사람들

이유진 2022. 8. 13.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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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커버스토리][한겨레S] 스페셜스토리
철학의 시대, 연구자의 시대
<창비> , <문지> 등 인문·지성지 시장 자체 사라진 시대
인문학의 소멸 시대에 새롭게 등장한 '공부하는 주체들'
"'A급 필자' 아닌 '자기 삶의 철학'으로 인문학 꿈꿉니다"
서울 마포구 종이잡지클럽 진열장에 인문잡지와 서평지들이 놓여 있다.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윤석열 대통령은 6월7일 국무회의에서 “교육부의 첫번째 의무는 산업 인재 공급”이라며 “교육부가 스스로 경제부처라고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모든 문제를 경제로 환원하는 ‘물신화’는 좌우막론 세계의 이념이다. 인문학처럼 ‘쓸모없는 공부’는 대학 안에 설 자리가 없다.

경제적 불평등, 기후변화, 생태위기 속에서도 삶의 전환을 말하는 목소리는 묻히고 만다. 솔직하고 담대하게 진리를 얘기한다는 뜻을 가진 ‘파레시아’의 철학은 사라지고, 구조를 해석하고 주체의 해방을 기획하는 사회학적 지식 생산에 관한 논쟁마저 대학 안에서 형해만 남은 지 오래다. 정통 인문사회과학 저자를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고, 그런 텍스트를 다룰 편집자가 사라지고 있다는 장탄식이 터져 나온다. 그럼에도 위기는 새로운 주체를 만들었다. 뜻있는 젊은 편집자들은 함께 모여 철학책을 읽고, 인문잡지를 낸다. 신자유주의가 낳은 자기계발적 주체와 달리, 쓸모없는 공부로 지식 자체를 향유하려는 늦깎이 학생, ‘지금 여기’에서 세계사적 위기를 분석하는 신진 연구자들도 꾸준히 태어난다.

인문잡지 내서 어쩔 셈인가

지적인 시민들이 있었다. 1953년 장준하가 창간한 비판적 지성지 <사상계>는 한때 발행부수가 9만7천부에 이르렀다. 1960~70년대는 <창작과 비평> <문학과 지성>의 시대였다. 1988년엔 사회과학 전문지 창간이 이어졌다. ‘학문과 사상의 대중화’를 내건 <사회와 사상>은 월 2만부, 운동 현장의 목소리를 실었던 <흐름>은 발행 초 8천부가 팔려 나갔다. 지금은 지성지 시장 자체가 ‘없다’는 게 중론이다.

“돈 되는 사업도 아닌데, 이 시대에 인문잡지를 내서 어쩔 셈인가요?”

지난 5일 서울 마포구 종이잡지클럽에서 ‘인문잡지를 만들어서 어쩔 셈이야?’란 도발적인 제목의 토론회가 열렸다. 30명 남짓한 방청객이 참여한 가운데 인문잡지 <한편>, 서평지 <교차>, 프랑크푸르트학파 기관지 <베스텐트> 한국판을 만드는 대표 편집자들이 저녁 7시30분부터 3시간 동안 뜨겁게 이야기를 나눴다.

오늘날 ‘돈 안 되는 인문잡지’를 만드는 것의 의미가 대관절 무엇이냐고 종이잡지클럽 김민성 대표가 먼저 질문했다. 지난해 10월부터 연 2회 서평지 <교차>를 펴내고 있는 출판사 읻다의 김현우 대표는 “200자 원고지 100장 이상의 길이로 깊이 있게 쓰는 서평을 통해 편집자와 연구자들에게 도움이 되고자 했다”고 답했다. 서평은 책의 감상을 적은 독후감과 달리, 읽은 책과 대결하면서 사유를 통해 지식과 의미를 생산하는 활동이다. 저자와 독자들 사이를 오가는 책의 통로로서 편집자, 연구자들에게는 필수적인 텍스트다.

<교차>는 한국 사회에 시대적 의미를 갖는 학술·교양서를 중심으로 책을 선정한다. 폐쇄적인 학계의 성채를 넘어, 분과와 경계를 넘어 10여편의 서평을 싣는다. 모든 문제에 해답을 가진 지식소매상이 아니라 해당 분야의 ‘진짜 실력자’들이 필자로 등장해 호평을 받았다. 첫호엔 장자크 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김영욱) 서평을 비롯해 한국에 미번역된 앙투안 릴티의 <살롱의 세계: 18세기 파리의 사교성과 세속성>(김민철), <젠더, 건강, 치유, 1250-1550>(세라 리치·샤론 스트로키아 엮음, 이민지) 등의 서평을 묶었다.

“저희 독자들은 586세대 등 보수적인 독자층 위주입니다. 책을 만드는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에 시의성보다는 시대성을 중시하죠. 편집자들이 저희 책을 통해 새롭게 책을 발견하고, 연구자들은 소중한 레퍼런스를 찾아 연구의 지평을 넓혔으면 합니다.”

지식 생산의 통로가 되는 ‘제대로 된 서평지’로서 자부심을 담은 김 대표의 말이다. 이 잡지는 ‘끝’을 염두에 둔다. 2024년 3월 6호로 완간을 하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 김 대표는 “매출과 기간을 계산해서 작업 가능한 선까지 시기를 정한 것”이라고 말했다. 완간까지 목표는 필자 서너명을 발굴하는 것, 두세권 정도 수출하는 것이다.

지난 5일 서울 마포구 종이잡지클럽에서 연 ‘인문잡지를 만들어서 어쩔 셈이야?’ 토론회. 왼쪽부터 신새벽 민음사 인문사회팀장, 박동수 사월의책 편집장, 읻다 김현우 대표. 이유진 기자

눈떠보니 지식 선진국

200여쪽, 200여g에 불과한 작고 가벼운 인문잡지 <한편>은 ‘책보다 짧고 논문보다 쉬운’ 새로운 세대의 인문잡지를 표방한다. 2020년 나온 창간호 <세대>부터 최근 8호 <콘텐츠>까지 역사학·인문학·인류학·철학 등 젊은 연구자들이 필진으로 참여했다. 창간을 주도한 신새벽 편집자는 “인문학을 살려야 한다는 게 기획 의도였다”고 말했다.

“기존 인문·철학 텍스트를 쓰고 읽는 주류 기성세대에 반감이 있었어요. ‘인문학 고인물’에서 벗어나고 제 자신조차 ‘싫어하는 인문학’과 반대로 만들고 싶었습니다. ‘일급 저자’, ‘에이급 필자’가 아니라 ‘자기 삶의 철학자’로서 인문학의 이름으로 언급되지 않는 이들을 호명하고 문제에 개입하는 정치적인 태도로의 전환을 꿈꿉니다.”

<한편>의 글은 편당 원고지 30매 안팎이다. 대중인문학보다는 어렵고 학술지보다는 쉬운, ‘교양과 학술 사이’ 어정쩡한 시장을 선점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잡지 누적 구독자 수는 8천명, 뉴스레터 구독자만 1만6천명이다. 창간호는 1만3천부(전자책 포함)가 팔려 나갔다. 인문잡지로선 독보적인 판매량이다.

종이잡지클럽 김민성 대표는 “이제 인문, 사회, 서평, 잡지라는 네 단어 중 위기가 아닌 것을 찾을 수 있는지조차 모르겠다”며 “<한편> <교차>는 판매를 위한 기업의 생산물이며 소비재이지만 공공의 역할을 수행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는 데서 의의가 적지 않다”고 말했다.

<교차>의 기획위원이자 <한편> 1호 첫글을 쓰면서 두 잡지에 모두 관여한 박동수 사월의책 편집장도 자리를 함께했다. 그는 프랑크푸르트학파의 기관지 <베스텐트> 한국판을 만들어왔다. 2019년 가을부터 ‘편집자를 위한 철학 독서회’를 진행해오며 최근엔 저자로서 민음사 ‘탐구 시리즈’ 첫권인 <철학책 독서모임>을 펴냈다. 박 편집장은 “인문잡지는 사상을 판매하는 사업”이라고 말했다.

“인문사상의 관객을 적극적으로 만들어야 하는 시대가 되었어요. 지식소매상으로 기능했던 한국도 이제 변했습니다. 선진국과 격차가 없어지고 외국에서도 대단한 인문학자가 나오지 않는 시기니까요. 이제 레퍼런스 없이 우리 스스로 우리의 인문학을 해야 하는 시대가 된 거죠.”

둘째 아이가 ‘고철방’(고뇌하는 철학자의 방)이라 이름 붙인 서재에서 강민혁씨가 책을 보고 있다. 강민혁 제공

아카데미 바깥의 독립연구자들

사설 아카데미에서 공부를 하거나 학교 바깥에서 공부모임을 이끌고 있는 이들도 있다. 단독 저서 <자기배려의 인문학>(2014)과 <자기배려의 책읽기>(2019)를 펴낸 강민혁씨는 연구자나 편집자들 사이에서도 잘 알려져 있는 ‘회사원 철학자’다. 38살 때인 2008년, 건강이 나빠져 술 담배를 끊는 대신 공부를 시작했는데 벌써 14년이 흘렀다. 그는 학습공동체 수유+너머, 감이당, 현대정치철학연구회에서 공부했다. 평일엔 새벽 일찍 일어나 책을 봤고, 출퇴근 시간에도 맹렬하게 책을 파고들었다. 베냐민, 마르크스, 들뢰즈, 푸코, 니체 등 서양철학을 공부한 뒤 지적 여정은 공자, 맹자, 주자와 종교학으로까지 이어졌다.

“철학하는 이들에게 몇가지 당부드리고 싶어요. 첫째는 마음가짐. 철학을 몰라도 그 자체로 즐거워야 해요. 스펙 쌓기보다는 향유한다는 생각이 있어야죠. 두번째는 시간 관리인데, 기쁘고 재밌으면 시간 내는 습관이 저절로 만들어집니다. 셋째, 겁먹지 말 것. 어려운 책도 거두절미하고 먼저 보는 게 좋습니다. 넷째는 타인들과 함께 공부하기. 나이가 들어서 진부해지는 것을 막을 수 있어요. 마지막으로는 글쓰기. 읽고 난 뒤 결국은 글쓰기로 내 지식은 완성됩니다.”

아쉬움은 외국어 영역이라고 한다. 그리스어, 라틴어, 프랑스어, 중국어 등 한두개 언어를 깊이 안다면 원전을 찾아서 인용을 할 수 있고 학문하는 자로서의 기본 소양이 될 것 같다는 것이다. “은퇴 뒤에는 언어 공부에 매진하고 싶다”고 그는 말했다.

최유미 수유너머104 연구원은 주석서 격인 <해러웨이, 공-산의 사유>(2020)를 냈고 도나 해러웨이의 <트러블과 함께하기>(2021)를 우리말로 옮겼다. 해러웨이의 2007년 작 <종과 종이 만날 때>도 번역해 9월에 나온다. 전문 번역가이자 연구자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셈이다.

해러웨이의 책들은 서구 근대 이분법의 철학, 자연과학을 비판하는 난해한 글쓰기로 독자에게 흥미와 고통을 선사한다. 철학, 생물학, 과학기술학 등을 넘나들기 때문이다. 최 연구원은 그런 점에서 적절한 번역자다. 1963년생인 그는 카이스트 화학과에서 이론물리화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아이티회사에서 20년 동안 일했고 그 기간 중 절반은 경영을 했다. “50살에 은퇴하고 그 이후엔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살 결심’으로 세계관과 사고체계를 구성하고 있던 것들을 바꿔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이론물리화학 박사 출신으로 철학을 연구하고 강의하는 최유미 수유너머104 연구원. 최유미 제공

2010년께부터 서울 남산강학원, 수유너머에서 익숙한 과학철학 공부부터 시작했다. “나 자신이 과학자 출신으로 과학적 진실만이 ‘사실’이라고 믿었던 ‘근대적 인간’이었는데 공부를 하면서 충격과 깨달음을 얻었다”고 그는 말했다. 차차 계간지에 투고하거나 강의도 거듭했다. 9월부터는 15주 동안 서울 서대문구 수유너머104에서 ‘사변적 우화’라는 주제로 대학원 수준의 강의를 시작한다. 미셸 세르의 <자연계약>, 에두아르도 콘의 <숲은 생각한다>, 메릴린 스트래선의 <부분적인 연결들>, 도나 해러웨이의 책들을 꼼꼼히 읽게 된다.

“학교 밖의 다양한 층위에서 담론이 만들어지면 학문 영역이 건강하게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대학원생들이 학교에 자리잡을 꿈을 꿀 수 없는 시대이기도 하잖아요. 지식 생산자들이 지식 임노동자가 아니라 새로운 삶의 방식을 창안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공부모임 겸 출판사인 전기가오리(philo-electro-ray.org)는 서양철학을 함께 번역, 출판하며 교육 서비스를 제공하는 학문공동체다. 2012년부터 본격적인 공부모임을 시작했고 2016년 출판에 발을 디뎠다. 후원제 기반 학습모델을 만들면서 공부모임은 초보자도 따라올 수 있게 자세히 설명하고 명쾌한 이해를 돕는 강의식으로 바꾸었다. 푸코 연구, <분배냐 인정이냐> 읽기, 영어 공부 등 다양한 모임은 폐쇄형 사회연결망서비스를 활용해 밤 10시부터 한시간 동안 진행한다.

전기가오리 누리집 화면 갈무리.

후원자 관리부터 강의까지 1인 다역을 맡고 있는 신우승(43) 대표는 대학원에서 강단의 불합리한 점을 실감했고 사설아카데미에서도 강압적인 리더의 태도를 보면서 전기가오리를 만들게 됐다. 현재 후원자는 7천명으로, 20~30대 여성들이 가장 많다. 신 대표는 “한국어로 최대한 이해할 수 있는 설명을 하려고 노력하며, 수준 높은 디자인을 구현하고, 친절하고 정확하게 응대하려는 점이 호감을 주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시장이 된 학교와 권위적인 교수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데 인문학 위기는 당연한 것이 아닐까요? 저희는 철학 공부의 위계나 권위를 내려놓고 ‘교육 서비스’라는 본령을 잊지 않으려 합니다. 지식은 실제 세계와 맞닿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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