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 최대 '빌런'에 저항한 평범한 노동자

김형민 2022. 8. 13. 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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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민 PD의 딸에게 들려주는 역사 이야기] 당시 독일 국민은 히틀러에게 압도적 지지를 보냈지만, 반역자 취급받으면서도 저항한 소수가 있었어. 특히 엘저의 용기는 '얼마나 아느냐'보단 '무엇을 느꼈느냐'가 중요하단 걸 깨닫게 해.
1939년 11월 히틀러가 연설을 했던 곳에서 폭탄이 터졌다. ⓒWikipedia

세계사 최대의 ‘빌런’은 누구일까. 누구도 그를 옹호할 수 없고, 그 일면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기조차 조심스러운. 누구나 그 악행에 치를 떨고, 상대방을 그에 빗대는 것조차 최대의 모욕으로 여겨지는 존재 말이다. 사람에 따라 많은 답이 나오겠지만 대체로 한 사람의 이름 앞에서는 군소리가 적을 것 같다. 나치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 히틀러와 그 부하들, 나치 추종자들이 저지른 반인륜적 범죄는 새삼 설명할 필요가 없을 거야. 더하여 우리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돌아봐야 하는 역사는 당시 독일 국민들이 히틀러에게 보냈던 열광적이고 압도적인 지지가 아닐까 해.

독일의 수백만 청소년이 거의 의무적으로 (상당수는 자발적으로) 가입했던 히틀러 유겐트, 즉 히틀러 소년단의 맹세를 읽으면 누군가에 대한 정치적 지지와 존경심이 위험한 맹목으로 쉽게 빠져들 수 있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된단다. “나는 독일국의 지도자이자 수상인 아돌프 히틀러에게 충성과 용기를 맹세합니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당신과 당신이 선택한 상관에게 복종할 것을 굳게 약속합니다.”

하지만 모든 독일인들이 히틀러에게 열광한 건 아니었다. 히틀러의 전쟁에 반대하고, 나치의 폭력에 분노하는 사람들이 소수나마 있었어. 절대 다수의 독일 국민으로부터 “자신들의 생활과 세계를 위협하는 존재이자 전시하에서는 자국 독일의 패배를 도모하는 반역자” 취급을 받으면서도 “아무에게도 알릴 수 없는 고독한 현실에 투신한”(〈히틀러에 저항한 사람들〉, 쓰시마 다쓰오 지음), 골리앗 앞의 다윗 같은 사람들 말이다.

〈히틀러에 저항한 사람들〉에 따르면 히틀러에 대한 암살 시도만 해도 40건이 넘었다. 톰 크루즈 주연의 영화 〈작전명 발키리〉의 주인공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의 히틀러 암살 기도는 특히 유명하지.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에게는 동지들이 많았어. 그를 반(反)히틀러 조직에 끌어들였다 할 헤닝 폰 트레슈코프 대령은 이렇게 얘기하곤 했다는구나. “독일과 세계를 사상 최대의 범죄자들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몇 사람이든 허물이 적은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행동해야 한다.”

1944년 6월 노르망디에 연합군이 상륙했고 복수심에 불타는 소련군은 동부전선의 독일군을 무찌르며 밀고 들어왔다. 히틀러를 죽이지 않아도 독일의 패배는 명약관화한 상황이 됐지. 트레슈코프 대령 역시 동부전선으로 차출되면서 직접 히틀러를 암살할 기회를 놓쳤어. 이즈음 트레슈코프 대신 행동에 나서기로 한 슈타우펜베르크가 트레슈코프에게 물었다고 해. “독일의 패망이 확실한 마당에 히틀러 암살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때 트레슈코프가 한 대답은 절망적인 가능성에 개의치 않고 대의를 위해 목숨을 바쳐온 사람들의 전범(典範)과도 같았다. “실제 목적(암살)은 문제가 아니다. 차라리 그것보다도 세계의 역사 앞에서 독일의 저항운동이 목숨을 걸고 결정적인 행동으로 나아갔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 밖의 것은 어떻게 되든 아무런 문제가 아니다(위의 책).” 우리는 영화 〈암살〉 속 전지현의 명대사를 떠올릴 수 있겠지. “(악질 친일파와 일본군 사령관) 둘을 암살한다고 독립이 되는 건 아니지만, 알려줘야지. 우리는 계속 싸우고 있다고.”

트레슈코프와 슈타우펜베르크 모두 그 이름에 ‘폰’이라는 귀족 칭호가 들어간 명문 집안 출신이야. 그들의 동지들 역시 집안 좋고 잘 교육받은 엘리트들이 많았어. 한데 히틀러를 죽이려던 사람 가운데 특이한 사람이 있었다. 게오르크 엘저(1903~1945).

독일이 폴란드를 공격하고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선전포고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의 막이 오른 두어 달 후인 1939년 11월8일. 독일 뮌헨에서 히틀러가 연설을 마치고 베를린으로 출발한 13분 뒤 텅 빈 연단에서 무시무시한 폭발이 일어났다. 행사가 끝난 뒤에도 여섯 명이 죽고 수십 명이 부상당했어. 나치는 영국 정보부의 음모라고 확신했지만 당일 한 독일인 목수 게오르크 엘저가 스위스 국경에서 체포된다. 그는 폭발 장소가 담긴 엽서와 폭탄 제조 과정 스케치 등 폭파와 관련된 놀라운 증거물들을 소지하고 있었어. 그리고 자신이 범인임을 인정했다.

게오르크 엘저가 히틀러 암살을 시도했다.ⓒWikipedia

“행동으로 나아갔다는 것이 중요하다”

나치는 당황했다. 그는 나치 지지세가 드높은 지역 출신으로 초등학교만 겨우 나와 평생을 목수 일을 하며 산 사람이었어. 공산당에 가입한 적은 있지만 이론 같은 것에는 별 관심이 없었고, 알코올 의존자였던 아버지의 빚을 갚느라 허덕이며 살았던 목수가 자그마치 ‘총통’을 암살할 시한폭탄을 만들어 터뜨리다니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지. 그래서 나치는 끝까지 엘저가 영국 정보부의 끄나풀이라고 우겼다.

그런데 대관절 이 목수는 왜 수천만 독일인이 ‘구세주’라 여기던 히틀러를 죽일 마음을 먹게 된 것일까. 여기에 대한 엘저의 진술은 단순하지만 명확하다. “1938년 가을 이후로 전쟁을 피할 수 없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필사의 각오로 노동자들의 고통스러운 처지를 개선하고 전쟁을 막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생각 끝에 현재 국가 지도부를 배제하지 않는 한 독일의 상황은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그런 결심을 하기 전까지 공장에서 (폭탄을 위해) 화약이나 기계 부품을 훔칠 생각은 없었습니다.”

히틀러와 그 하수인들이 전쟁을 향해 폭풍같이 질주하던 1930년대 말, 독일군의 긍지 높은 엘리트 장교들 일부도 히틀러를 제거하려고 했어. 하지만 계획은 차일피일 미뤄지고 사람들이 발을 빼고 손을 떼면서 끝내 무산됐다. 막상 전쟁이 벌어지자 히틀러 암살을 꿈꾸던 장교들은 히틀러의 충성스러운 수하로, 전 유럽에 나치의 깃발을 휘날리는 전위대로 전락하고 말았지. 하지만 초등학교만 겨우 나온 목수, 그 이전에는 폭탄을 만져본 적도 없던 엘저는 전쟁을 막기 위해서는 히틀러 등을 해치워야 한다는 일념으로 거사를 준비하고 실행에 옮겼던 거야.

정직하고 용감했던 독일군 장교 슈타우펜베르크와 트레슈코프, 그리고 그와 함께했던 독일인들은 자신들이 받은 교육과 경험, 상식에 어긋나는 나치 정부와 히틀러에 반기를 들었다.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의 마지막 외침은 “영광스러운 독일이여, 영원하라”였어. 히틀러의 독일은 결코 ‘영광스러운’ 독일이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히틀러를 죽여서라도 전쟁을 막아야 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군인들이나 엘리트들보다 앞서서 홀로 행동으로 옮긴 이가 평범한 노동자였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있을 것 같다.

우리는 뭔가 해보려는 사람들에게 곧잘 “네가 뭘 안다고 그러느냐”라며 타박할 때가 있지 않니. 하지만 역사 앞에 용감했던 이들을 돌아보면 중요한 것은 얼마나 아느냐보다는 무엇을 느꼈느냐의 문제가 아닐까 해. 엘저는 교육의 기회는 적었지만 나치의 폭력성에 분노했고, 고향 사람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오른팔 들어 내미는 나치식 경례를 할 때 혼자 팔짱을 꼈다. 그리고 다가오는 전쟁의 냄새를 누구보다 역겨워했지. 그 결과 엘저는 이후 수천만의 목숨을 앗아갈 전쟁의 책임자들을 정확하게 짚어냈어. 그가 자백한 목표물(?)은 히틀러, 그의 부하 괴벨스, 그리고 히틀러의 공군 사령관이자 후계자를 자처하던 괴링이었으니까. 세계사 최악 빌런의 시대, 수천만 독일인이 최면에 걸린 듯 ‘총통 만세’를 부르짖고 마지막 순간까지도 독일과 히틀러를 동일시했던 암담한 나날에도, 당시에는 미약했을지언정 오늘날 우리에게 창대한 빛으로 남은 사람들은 살아 움직이고 있었단다.

김형민(SBS Biz PD)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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