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문화 클릭하기] 인간쓰레기의 사회

홍성일 한국예술종합학교 강사 2022. 8. 13. 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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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오늘 홍성일 한국예술종합학교 강사]

마침내 '쓰레기'가 되어버렸다라는 생각을 한지 오래인데, 중년 남성의 자의식 과잉이나 자기비하를 통한 수동공격성이라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 부연하자면 현대성의 이론가 지그문트 바우만이 <쓰레기가 되는 삶들>(정일준 역, 2004/2008)에서 이야기한 바의 의미로 그렇다는 것이다.

바우만은 생산자 사회와 소비자 사회를 구분한다. 생산자 사회가 형식적으로나마 산업예비군, 사회부적응자를 교화시켜 사회로 흡수해 생산에 재활용하려는 사회였다면 소비자 사회는 사람들을 취약성에 노출시켜 급속도로 유행을 창출하고 불확실성을 가속화하며 각자도생으로 흩뿌려지도록 설계된 사회이다.

소비자 사회는 이른 아침의 말끔한 도심 풍경과 닮았다. 분리 배출된 쓰레기는 새벽 청소로 눈앞에서 사라지고 사람들은 분주히 새로운 쓰레기를 만들며 쓰레기의 향방과 그 수거자가 누구인지 무심한 채 오늘의 활력을 얻어간다. 문제는 필연적으로 만들어진 쓰레기 안에 소비력이 모자란 살아있는 사람들도 포함된다는 것이다. 이 속에서 “'각종 불운 또는 타인에게 부당하게 대우받는 것'조차 '그러한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한다는 이유로 반사회적 범죄로 간주'되었다.” 마치 장애인 이동권 시위가, 수 십 년 일한 노동자들이 겨우 최저임금만을 받는 현실을 구제해달라는 호소가, 여성 또한 인간답게 대우해달라는 목소리가 시민을 볼모로 삼고 불법을 획책하며 정신병이라는 듯이 말이다.

▲ 8월2일,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 관계자들이 서울 용산구 4호선 삼각지역 승강장에서 장애인 권리 예산 보장을 촉구하며 삭발 시위를 벌이고 있다. ⓒ 연합뉴스

막스 베버가 <직업으로서의 학문>에서 말한 바대로 이전의 학문적 성취가 이를 능가하는 성취로 낡아질 운명이자 그것이 학문의 목적이라면, 나의 '쓰레기'가 되어버렸다는 우울은 오히려 영광스러운 감정이었을 터이다. 그러나 편법과 요행으로 학위를 취득하고 이를 발판삼아 또 다른 상품화를 꾀하면서도 식언하는 이들, 돈 되는 분야로 쏠리고 이들만의 배타적 인적 사슬이 견고화되는 학계의 풍경, 교육을 그저 직업 훈련으로만 인식하는 관료의 경박한 언사와 이를 마주하도고 침묵하거나 공모하는 관계자의 눈치 보기 속에서 '쓰레기'가 되는 이들은 절망을 넘어 깊은 무력감으로 침잠한다.

비단 학계뿐일까. 최근 아모레퍼시픽 그룹은 70년대생 팀장들을 대거 팀원으로 강등시키고 그 자리에 80년대생을 채웠다. 90년대생 재벌가 딸의 경영 승계 일환이다. 아모레퍼시픽만의 일도 아니다. 명예퇴직과 구조조정은 흡사 자연의 섭리처럼 느껴진다. 바우만의 말처럼, “'쓰레기'로 지정되는 것은 이제 더 이상 과거처럼 일부 분리된 인구만의 문제가 아니며 모든 사람의 잠재적 전망이 된다.” 희소한 자원의 독점, 자본의 초거대 축적이 가능한 소비자 사회를 위해서 누군가는 반드시 '쓰레기'로 할당되고, 배출되며, 사라져야 한다.

'인간쓰레기'의 생산, 관리, 배제에 대한 바우만의 통찰은 2022년 방송통신위원회 방송대상 수상작 KBS 환경스페셜 <옷을 위한 지구는 없다>(오빛나 글·구성, 김가람 연출 2021)를 통해 탁월하게 예증된다. 다큐멘터리는 가나의 수도 아크라 해변에 밀려오는 폐기된 옷들로 시작하는데, 옷의 자리에 인간을 대입한다면 그 어떤 묵시론적 영화보다도 무섭다. 패스트 패션의 부산물과 인간의 등치가 비약일리 없다.

▲ KBS 환경스페셜 '옷을 위한 지구는 없다' 갈무리

시장이 모든 가치 판단의 기준이 되는 사회에서 상품과 인간의 차이는 사라졌다. 유행에 맞지 않거나 수요 예측에 실패하여, 혹은 단순 싫증으로 버려지는 옷과 싼 몸값으로 소진되고 소모되며 비정규직을 전전하다 비참에 이르는 인간의 삶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헌 옷이 수거되어 제3세계로 팔려나가듯, 난민과 경제 이주민 또한 모국의 터전을 잃고 새 땅으로 밀려난다. 이들 중 극히 일부만이 원래 쓰임새를 회복할 뿐이다.

대부분의 폐기 의류가 방치되어 쓰레기 산이 되듯, 이들은 빈민가나 게토로 흘러가고 의류 폐품이 소각되듯, 때론 집단 학살에 노출된다. 친환경 의류 재활용만으로는 부족하다. 이는 바우만이 지적한 바대로 “도덕적 정상성을 유지하고 싶다는 간결한 욕망을 만족시키는 동시에 유해한 인간쓰레기를 처리하고 싶다는 터질듯한 바람”에 부합할 뿐이다. 결국, 덜 만들고, 적게 사고, 오래 사용할 수밖에 없다. 사람도 마찬가지. 속도를 늦추어 소비를 제어하고 시장 바깥의 삶을 되살려야 한다. 이대로라면 우리는 모두 '쓰레기'가 되어버릴 운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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