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등(等)의 마법

최원규 논설위원 2022. 8. 13. 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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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개 열거하다 그다음이 생각나지 않을 때 쓰는 말이 ‘기타 등등’이다. 기타(其他)는 그 밖의 다른 것, 등등(等等)은 그 밖의 것을 줄인 것을 뜻하니 기타 등등은 구체적으로 제시한 것 이외의 것들을 의미한다. 중요도에서 밀렸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어느 기타교실 학원장은 기타의 장점을 설명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 “세상 모든 악기는 ‘기타’와 ‘기타 등등’으로 나뉜다.”

한동훈 법무부 장관./뉴스1

▶ 그러나 법령(法令)에서의 ‘등’은 그렇게 만만한 존재가 아니다. 간혹 손오공의 여의봉처럼 대상을 마구 늘리는 마법을 부린다. 2003년 금융 당국이 미국계 사모펀드 론스타의 외환은행 인수를 승인한 것도 ‘등’을 활용한 것이었다. 당시 외환은행은 매각할 수 있는 부실 금융기관이 아니었지만 금융 당국은 “부실 금융기관 정리 ‘등’ 특별한 사유가 있다고 인정되는 경우 요건을 갖추지 않아도 된다”는 시행령 예외 조항의 ‘등’에 기대서 외환은행을 매각 대상에 밀어 넣었다. 당시 확대 해석이란 논란이 일었다.

▶민주당이 밀어붙인 ‘검수완박’ 법안 시행을 앞두고 법무부가 검찰 수사 대상을 상당 부분 원상 복구시키는 시행령을 11일 입법예고하자 민주당이 반발하고 있다. 법안에서 검찰 수사 대상을 공직자·선거 등 6대 범죄에서 부패·경제범죄 등 2대 범죄로 줄였는데 시행령에서 수사 범위를 늘린 것은 입법권 침해라는 것이다. 이런 논란이 생긴 것도 법안의 ‘등’ 자 때문이다.

▶법안은 ‘부패범죄, 경제범죄 등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중요 범죄’를 검찰 수사 대상으로 정하고 있다. ‘등’을 넣어 수사 범위를 시행령(대통령령)에서 정하도록 한 것이다. 법무부는 이를 활용해 원래 공직자 범죄였던 직무유기·직권남용 등을 부패 범죄로 분류하는 방식으로 수사 범위를 넓혔다. 한동훈 법무장관은 “법안은 (중요 범죄 범위를) 얼마든지 넓힐 수 있는 재량권을 줬다”며 “(오히려) 중요 범죄를 최소한으로 규정했다”고 했다. 법 취지대로 했다는 것이다.

▶누구 말이 맞는 걸까. 법률가들은 대부분 법무부가 맞는다고 했다. 법 문언상 방점이 ‘중요 범죄를 대통령령으로 정한다’에 있지, 부패·경제범죄로 수사 대상을 한정한 것으로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또 입법자 의사와 다르더라도 법 문언이 명백하면 문언대로 해석하는 게 원칙이라고 했다. 원래 이 조항은 법사위 통과 당시 ‘부패·경제범죄 중’이었는데, 여야 협의 과정에서 ‘중’이 ‘등’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민주당이 ‘등의 마법’을 무시하다 큰코를 다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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