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인삼업은 이미 19세기에 산업화됐다"

유석재 기자 입력 2022. 8. 13. 03:08 수정 2022. 8. 13. 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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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개성상인과 인삼업

양정필 지음 | 푸른역사 | 396쪽 | 2만5000원

“19세기 중엽에 개성상인의 홍삼 생산 능력은 연 4만 근에 이르렀다.” 20세기 전반 한반도의 인삼 수출량을 이미 한 세기 전에 달성했다는 점에서, 이 책은 인삼업이 일찌감치 ‘근대산업’으로 자리 잡았다고 말한다.

제주대 사학과 교수인 저자는 조선 인삼업과 개성상인의 역할을 ‘산업사’의 측면에서 다시 조명한다. ‘승정원일기’부터 개성부의 ‘호적세표’까지 사료를 꼼꼼하게 분석한 결과물이다. 경상도에서 시작됐던 인삼 재배가 1820년대 이후 개성에서 뿌리 내린 이유 중 하나로, 농사만으로 생계 유지가 어려웠던 자연 조건 탓에 수익성 높은 인삼에 매달렸던 사실을 든다. 무담보 대출이 가능했던 이 지역의 신용 제도도 있었다.

숱한 인삼 거물들의 이야기도 흥미롭다. ‘인삼대왕’ 손봉성은 교육계몽 운동을 이끈 개성학회의 회장을 지냈고, 개성인삼상회의 최익모는 백삼 허리를 금띠로 감싸고 화인(꽃도장)을 찍은 상자에 담아 내놓았던 마케팅의 귀재였다. 1898년 대한제국이 인삼업을 관영화하려 하자 개성의 업자들이 인삼 종자를 모아 태워버리는 시위를 했던 ‘개성 민요(民擾)’ 등 그동안 역사서에서 잘 다뤄지지 않았던 사실도 짚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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