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시각] 기후변화가 만든 ‘맹탕 와인’

박상현 기자 2022. 8. 13. 03:05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프랑스산(産) 좋은 와인 실컷 마셔두세요. 이상기온으로 수십 년 후 ‘신의 물방울’은 ‘신의 눈물방울’이 될 테니.”

올봄 프랑스 사는 소믈리에 지인으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 프랑스에 때아닌 ‘4월 한파(寒波)’가 불어닥친 때였다. 포도나무가 싹 틔울 시기에 눈이 내렸다. 주요 와인 산지인 보르도·부르고뉴·상파뉴 최저기온이 영하 6~9도로 떨어졌다. 1947년 이후 75년 만에 가장 추운 봄이었다. 농부들은 냉해를 막으려 매일 밤 드넓은 포도밭 곳곳 양초를 태웠다. 양초 온기로 서리와 싸웠다.

“촛불은 잠시 한기를 달랠 순 있어도 포도맛을 지켜주진 못한다. 기상이변이 늘어날수록 와인 생산량은 줄고 값은 오를 텐데 맛은 장담 못 한다.” 와인을 업으로 삼은 그는 한탄했다. 그러니 포획이 금지돼 더는 먹을 수 없는 진미(珍味)를 앞에 둔 마음으로 당장 와인을 마시라고 했다. “그래야 추억 속에라도 맛을 담아둘 수 있다”면서.

지난 2일 프랑스 남서부 보르도 인근 메리냑의 한 포도밭에서 포도나무에 물을 주고 있다./AFP 연합뉴스

흔히 와인을 ‘천지인(天地人)의 결과물’이라고 한다. 하늘[天]은 일조량·강수량과 산불·지진 등 기상 여건, 땅[地]은 포도의 양분인 토양 특성, 사람[人]은 생산자를 뜻한다. 양질 토양에서 충분한 볕을 쪼이며 자란 포도를 숙련 농부가 가꾸어 낼 때 최고 와인이 만들어진다는 의미다. 유명 일본 만화에선 이런 와인을 ‘신의 물방울’이라 부르며 책 제목으로 삼았다. 기상이변이 속출하면서 ‘신의 물방울’ 만나기는 점점 어려워질 것이다.

와인 양조에서 가장 큰 변수는 ‘강수량’이다. 비가 너무 많이 오면 열매가 물을 머금어 와인 맛도 싱거워진다. 이런 해는 통상 ‘물빈’으로 불리며 다른 해 만들어진 와인보다 상대적으로 싼값에 팔린다. 반면 ‘그레이트 빈티지’는 볕이 좋았던 해다. 보르도 역사상 최고로 손꼽히는 1982년은 ‘수퍼 그레이트 빈티지’라 칭송받으며 사치품 대접을 받는다. 하늘은 컨트롤할 수 없기에 하늘이 좋았던 해를 최고로 꼽는 것이다.

기상이변에 따른 지진·산불 변수도 커졌다. 2014년 8월 미국 캘리포니아주(州)에선 1989년 이후 가장 큰 규모인 6.0 강진이 발생해 나파밸리 여러 와이너리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캘리포니아 산불은 최근 5년간 2017, 2019, 2020년 세 차례 발생했다. 큰 산불이 난 재작년엔 화마(火魔)에 1860년대부터 와인을 만든 ‘베린저’의 포도밭이 불탔고, ‘샤토 보스웰’의 석조 건물이 잿더미가 됐다. 가뭄도 심각해 올 5월 캘리포니아 지역 최대 저수지인 섀스타 호수의 총수량이 사상 첫 40%대로 떨어지며 농장에 댈 물조차 부족한 상황이다.

와인뿐만 아니라 기후 변화 여파로 앞으로 우리 추억 속에서만 간직될 대상은 점점 더 많아질 것이다. 요 며칠 하늘에 구멍 뚫린 듯 서울과 중부 지방에 쏟아진 비가 신이 흘리는 눈물방울처럼 보인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