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잠시 소풍 나온 아이가 죄 없이 끄적여 놓은 감상문"

김인혜 국립현대미술관 근대미술팀장 2022. 8. 13.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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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김인혜의 살롱 드 경성] 무해한 성품처럼 평온한 '모자상'
탄생 100주년 맞은 화가 백영수
백영수의 ‘모자상’, 1976년 作,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백영수가 프랑스 파리로 가기 직전에 그린 작품으로, 비행기 값을 벌기 위한 ‘도불전’에 출품되었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는 ‘고 이건희 회장 기증 1주년’ 특별전에서 전시 중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사람들은 화가 백영수의 이름을 잘 모른다. 하지만 막상 그의 그림을 보면, 어디선가 본 듯한 친근감을 느낄 것이다. 1978년 처음 나와 2002년 150쇄를 찍은 전설적인 베스트셀러,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표지 그림이 익숙해서일까. 여리고 힘없어 보이는 가족이 우두커니 앉아 있는 모습 위로, 푸른 하늘에 새가 나는 그림 말이다. 세상에 참 ‘무해한’ 존재이지만, 아무도 그 존재의 가치를 알아보지도 돌보지도 않는, 그런 느낌의 가족 그림이다. 왠지 슬프고 쓸쓸한 이 그림을 그린 화가가 백영수이다.

조세희 소설집,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1978). 표지그림: 백영수

◇앞 학생 머리통 뒤에 숨어서 보낸 학교생활

백영수는 1922년 수원에서 태어났다. 두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스무 살도 안 된 엄마는 친오빠가 살고 있던 일본 오사카로 어린 백영수를 데려갔다. 도자기로 전기두꺼비집 만드는 일을 했던 외삼촌 집에 살면서, 백영수는 일을 나가 바쁜 엄마와 떨어져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백영수가 초등학생이 되었을 때, 그는 스스로 표현하기를 “앞자리 학생의 머리통 뒤에 숨어 지냈던 아이”였다고 한다. 수줍음 많고 말수가 적었던 그는 학교에서 ‘존재감 제로’였던 것이다. 다만, 한 가지 재주만은 출중했으니, 배운 적도 없는 그림을 잘도 그렸다. 믿기지 않을 만큼 빠른 속도로 슥싹슥싹 그림을 그려내 선생님이 진짜 이걸 지금 막 그린 것인지 눈앞에서 시연해 보라고 시킨 적도 있었다.

자신 있는 일이라고는 그림 그리는 것뿐이었기에 자연히 미술대학을 가려 했지만, 어머니 반대가 심했다. 가출해 도쿄로 가 고학을 하다가, 결국 어머니 허락을 받아내고 오사카 미술학교에 입학했다. 하루 200장의 크로키를 할 만큼 열심히 그리기에 매달려, 교수들로부터 인정받았다. 야노 교손이라는 일본화계의 거두에게 발탁돼 그의 문하생이 되기도 했다.

백영수, ‘새와 소년’, 1976.

◇‘성냥갑 속의 메시지’

1945년 2차 대전이 한창일 때 오사카 집이 폭격을 맞았다. 시모노세키에서 여수행 배를 타고 무작정 목포에 정착했다. 그러나 이 여리고 수줍은 성품의 소유자인 백영수에게 세상은 참 험악했다. 목포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가 누드화를 그렸다는 이유로 오해를 받아 쫓겨나고, 광주 조선대학교의 미술대학 창설에 기여했으나 여기에서도 알 수 없는 모함으로 내쳐졌다. 그는 세상에 요령껏 적응하는 법을 도무지 터득하지 못했던 것 같다.

1947년 상경해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전시회를 열며 조금씩 미술계에 이름을 알렸다. 워낙 ‘무해한’ 성품의 소유자였기에, 그를 좋아하는 이들이 차츰 늘어났다. 국제연맹 프랑스 대표 자격으로 서울에 와 있던 알베르 그랑이 대표적이다. 그는 백영수의 작품을 보자마자 반해, 백영수를 알베르 블랑(blanc, 백영수의 성 ‘백(白)’을 의미)이라고 부르며, 친형제처럼 살뜰히 챙겼다. 백범 김구가 알베르에게 선물한 정성 어린 수제 포도주가 대부분 백영수 차지였을 정도였다. 알베르는 1948년 당시 유엔 사무실로 사용되던 덕수궁 석조전에서, 유엔 후원의 백영수 개인전을 열어주기도 했다. 이 일로 한때 유명세를 탔던 백영수는 그때 번 돈으로 남대문 노점판에서 예쁘게 포장된 과자며 술을 한 지게씩 사가지고 와서, 집에 오는 사람마다 한 상자씩 나눠주는 즐거움을 누렸다고 한다.

백영수(왼쪽)와 알베르 그랑, 1940년대.
백영수, ‘새’, 1975

세상 물정 모르고 눈치도 둔했던 백영수는 공격적인 성향의 사람들로부터 상처도 참 많이 입었다. 그러나 조용하고 베푸는 성격으로 인해, 진솔한 친구를 많이 사귈 수 있었다. 소심한 성격의 소유자가 그러하듯, 백영수는 타인에 대한 공감력이 뛰어났고, 글도 참 잘 썼다. 특히 그가 해방과 전쟁기 한국 예술가의 생활을 담담하게 기록한 회고록 ‘성냥갑 속의 메시지’는 ‘명동백작’이라 불린 이봉구의 ‘명동 20년’만큼이나 흥미로운 기록물이다.

사람들을 2차에 잔뜩 초대해 술 마시고 있으라고 해놓고 물주를 찾아다니던 시인 구상 이야기, 서울에 처음 올라와 가난하던 시절, 국밥 먹는 사람 등 뒤에서 쿡 찔러 밥을 남기게 하고 그걸 얻어먹은 서정주 이야기, 3분의 1가량 쓰다 남은 물감 튜브 한 개를 내밀며 그 물감값으로 돈을 조금만 달라고 말하던 이중섭 이야기, 전쟁 중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해 감시받는 신세가 된 백영수가 ‘미끼’가 되어 다방에 앉아 있을 때 성냥갑에 ‘인천상륙’이라는 메모를 남기며 조금만 더 버티라는 메시지를 전달해준 시인 전봉래 이야기, 그리고 그 전봉래가 스타다방에서 청산가리를 마시고 자살한 이야기, 명동 네거리 언제나 같은 장소에서 온화한 미소로, 차 한 잔 값도 안 되는 돈을 구걸하며 연명하다 결국 생활고로 숨을 거둔 ‘보리밭’의 작곡가 윤용하 이야기…. 이런 온갖 슬프고 애틋한 이야기들로 가득한 책이다. 백영수는 사람에 대한 따뜻한 관심과 섬세한 관찰력으로,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에 사는 예술가들의 무모한 낭만을 그렇게 기록했다.

백영수, ‘이른 봄’, 1969

◇백영수의 모자상

하루에 200장씩 크로키 연습을 하던 실력을 발휘해, 백영수는 1950년대 신문·잡지의 표지화와 삽화 그리는 일을 아주 많이 맡았다. 전쟁 통에 다방에 앉아서 잡지 편집자가 삽화를 그려달라고 요청하면, 바로 그 자리에서 제일 빨리 그려내는 화가로 알려져 있었다. 그렇게 생계를 연명하면서, 백영수는 약 10년간 제대로 된 화가 생활을 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전쟁이 끝난 후 생활고에 파묻혀 있었고, 정신적 시련이 많았던 것으로 추측될 뿐이다.

‘화가’ 백영수가 다시 일어난 계기는, 26세 연하의 제자로 백영수의 아내가 된 김명애와의 만남 덕분이었다. 1967년 이들은 처음 화실에서 만났고, 1971년 딸 혜원을 얻었다. 백영수의 나이 49세에 낳은 귀한 딸이었다. 그의 작품에 ‘모자상’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이 이 무렵부터였다. 백영수는 ‘어머니가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아름다움을 지녔다고 여겼다. 높은 파고(波高) 속에서도 세상을 헤쳐나갈 힘을 주는 원천 에너지가 바로 어머니의 무조건적인 사랑이라고 믿었다. 모자상을 그리면서, 백영수도 자신의 근원적 불안과 오랜 상처를 치유해 나갔을 것이다.

그런데, 처음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어머니와 아이는 왠지 깊은 우수에 잠겨 있고, 아이는 엄마에게 딱 달라붙어 집착에 가까운 방식으로 표현돼 있다. 어쩐지 측은하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모자상이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 등장할 것 같은, 그런 가족이다. 이런 모자상이 점차 차분해지고 고아해져서 성스러운 경지에까지 이르는 과정이 어쩌면 백영수 화업의 전부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백영수, ‘모성의 나무’, 1989
백영수, ‘나무있는 집’, 2001
백영수, ‘날으는 모자’, 2011

어쨌든 백영수는 그의 아내와 딸을 통해 점차 세상을 살아갈 용기를 얻었다. 1977년에는 코리아헤럴드에 있던 천승복의 도움으로, 뒤늦게 파리에 가서 화업에 집중할 기회를 가졌다. 일본 요미우리 신문사가 파리에서 운영하던 요미우리 화랑에 전속 화가로 발탁되어 생활의 안정을 얻기 시작했다. 이탈리아의 꽤 이름난 화상인 앤조 파가니의 눈에 들어 밀라노에서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그는 1977년부터 한국에 영구 귀국한 2011년까지 약 34년간 파리에서 활동하며, 총 100여 차례의 전시회에 참여했다. 그는 대단한 성공을 거둔 화가는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유럽에서 그림을 팔아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화가였다. 파리에 살면서 남프랑스 빌라 슐 바(Villars-sur-Var)에 별장을 갖고, 파리 근교와 노르망디에 아틀리에를 짓고, 따뜻한 이웃을 만나고, 다양한 사람과 교유하며, 계속해서 그림을 그렸다.

파리 몽마르트에서 백영수 가족, 1980
백영수, ‘벽난로’, 1990. 백영수가 프랑스에 체류하던 시기 그린 작품이다.

◇하얀 마음, 하얀 그림

백영수의 그림은 단순하고 순진무구했다. 빌라 슐 바에서 별보기를 좋아했던 아내가 어두운 밤에 자꾸 밖을 나가자, 화면 가득 별들이 빽빽한 그림을 선물했다. 노르망디에 화실을 짓느라고 불도 들어오지 않은 창고에서 추위에 떠는 아내를 위해, 노란 해 그림을 즉석에서 그려 주기도 했다. 물속을 열심히 헤엄치는 송사리 떼, 잔잔하게 흔들리는 꽃들, 잠든 고양이, 하늘을 나는 새, 그 새들에게 모이를 주는 사람…. 이런 사소하고 연약한 존재들에 눈길을 보내고, 이들을 포근하고 평온하게 그렸다.

백영수, ‘별’, 2011. 별보기를 좋아했던 아내를 위해 그려준 작품이다.

백영수는 강력하고 초인적인 의지력을 가진, 그런 종류의 사람이 아니었다. 반대로 언제나 불안하고 여린 감성을 지닌 이였다. 강렬한 욕망을 내지르는 사람이 아니라, 그저 천진하고 가볍고 자유롭기를 바란 사람이었다. 그를 대단히 위대한 화가였다고 말할 수는 없을지 모르지만, 어린아이 같은 천진함을 평생 한 번도 놓지 않은 화가였다고는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그의 그림은 “세상에 잠시 소풍 나온 아이가 죄 없이 끄적여 놓은 감상문”이었다.

그의 화면은 세월이 갈수록 더욱 가벼워져서, 점차 ‘제로’에 가까워졌다. 캔버스가 점차 하얗게 뒤덮여 가던 어느 날, 백영수의 죽음이 고요히 찾아왔다. 2018년 작가가 오래 머물던 의정부의 집을 미술관으로 고쳐 지은 후, “햇볕 가득히 들어오는 남쪽 넓은 창 앞에서 잠들 듯 떠났다”고 부인은 회고했다. 그의 나이 96세였다.

백영수, ‘정오’, 2001

많은 작품이 남았고, 현재 전시 중이다.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는 ‘고 이건희 회장 기증 1주년’ 전시에 프랑스로 떠나기 직전 백영수가 그린 모자상이 전시돼 있다. 1977년 파리행 비행기표를 마련하기 위해 열렸던 ‘도불전(渡佛展)’에 나왔던 작품으로, 이후 공개된 적이 없다가 작년 이건희 회장 유족에 의해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됐다. 백영수가 남긴 대부분 작품은 의정부 백영수미술관에 보존돼 있다. 그의 새하얀 미술관에 아내 김명애 관장이 마련한 ‘백영수 탄생 100주년’ 전시가 지금 열리고 있다. 의정부 호원동 성당에는 화가가 죽기 하루 전 봉헌식을 마쳤던 스테인드글라스(유리화) 2점이 걸려 있다. 백영수의 모자상에는 ‘성모 마리아’라는 이름이, 새들에게 모이를 나눠주는 사람 그림에는 ‘성 프란체스코’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백영수가 종교화를 그리려고 한 것은 아니었지만, 사람들 눈에 그의 그림이 그렇게 읽혔다. 영원한 ‘사랑’과 ‘나눔’을 일깨우는 그림이기 때문일 것이다.

백영수, ‘모자상’, 스테인드글라스, 2016
의정부 백영수미술관 전경
백영수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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