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 시력 잃어 초점 흔들린 풍경, 감정은 더 많이 담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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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퍼키스 사진전
그에게 ‘스승’이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리는 이유는 또 있다. 수십 년간의 사진 강의 경험을 바탕으로 저술한 책 『사진강의 노트』, 사진집 『워릭 마운틴 시리즈』 『인간의 슬픔』 『한 장의 사진, 스무 날, 스무 통의 편지』 『바다로 떠나는 상자 속에서』 『멕시코』 등을 통해 퍼키스는 한 장의 사진을 ‘보는’ 데 머물지 않고 어떻게 ‘이해하고’ ‘읽어야’ 하는지에 대해 끊임 없이 이야기해왔다. 그가 사진가들의 스승이자, 사진을 사랑하는 관객들에게도 위대한 스승인 이유다.
이번 사진전은 불교 구도자를 연상시키는 필립 퍼키스의 철학을 또 한 번 떠올리게 하는 자리다. 퍼키스는 2007년 망막 폐색증으로 왼쪽 시력을 잃었다. 반세기 동안 카메라 파인더를 들여다보던 바로 그 눈을 잃은 것. 이후 3개월 동안 그는 “나의 왼쪽 눈”이라고 부르던 라이카 카메라로 더 이상 초점을 맞출 수 없었다. 결국 생전 처음 자동카메라를 구입했고, 반경 100미터 이내 해질녘 풍경을 첫 촬영지로 삼았다. 그 기록이 이번 사진전에 걸린 12장의 작품이다.
시간을 가늠할 수 없는 흑백사진 속 풍경들은 특별하지 않다. 어딘가 초점도 흔들려 보인다. 그런데 그 고요함 속에서 잔잔한 파동이 느껴진다. 퍼키스 또한 이 12장의 사진을 직접 인화해서 포트폴리오 상자에 따로 담으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오른쪽 눈으로 촬영한 사진들은 이전 사진보다 감정이 많이 담긴 것 같다.” 한쪽 눈으로만 세상을 보게 된 87세 노 사진가는 그 순간, 어떤 감정의 동요를 느꼈을까.
이번 사진전 작품들은 국내에서 최초로 공개되는 사진들이자 늘 모든 사진을 직접 인화해온 퍼키스가 더 이상은 암실작업을 이어갈 수 없다는 점에서 다시 만나기 어려운 귀한 사진들이다. 전시는 서울 전시 이후 새로 개관한 부산 달맞이길의 안목갤러리로 이어질 예정이다. 무료.
서정민 기자 meantr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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