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동군 사령관 "푸이, 집정제 거부하면 적 간주" 최후통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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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39〉
정샤오쉬, 푸이 서신 빼고 선물만 전달
1932년 2월 23일, 뤼순의 숙친왕 관저에서 이타가키와 푸이의 회담이 열렸다. 말이 좋아 회담이지 통보나 마찬가지였다. “장쭤린(張作霖·장작림)과 장쉐량(張學良·장학량) 부자의 학정은 민심을 얻지 못했다. 보장받아 마땅한 일본의 정당한 권익도 인정하지 않았다. 일본은 왕도낙토(王道樂土)를 건설하려는 만주인들의 염원을 돕고자 한다. 새로운 국가의 국명은 만주국, 수도는 창춘(長春)으로 정했다. 이에 창춘을 신징(新京)으로 개명했다. 만주국의 중요 구성원은 만족(滿族), 한족(漢族), 몽골족(蒙古族), 일본족(日本族), 조선족(朝鮮族)이다. 일본인들은 수십 년간 만주 발전에 심혈을 기울였다. 관리 등용에 다른 민족과 동등한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다.”
평소 선통제나 황제폐하라 부르던 일본인의 입에서 각하라는 말이 나오자 푸이는 당황했다. 논어의 한 구절 인용하며 낯선 칭호에 항의했다. “명분이 바르지 않으면 말이 바르지 않고, 말이 바르지 않으면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 법이다. 만주인이 바라는 것은 나 개인이 아닌 청 제국의 황제다. 관동군은 숙고하기 바란다.” 이타가키가 두 손 조아리며 말을 받았다. “만주인들이 각하를 추대한 이유는 민심이 각하에게 있기 때문이다. 관동군의 동의는 당연하다.” 푸이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일본도 천황제를 신봉하는 제국이다. 관동군이 공화제에 동의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이타가키도 만만치 않았다. “공화제가 아닌 집정제다.” 푸이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간 귀국의 성의와 도움에 감사를 표한다. 집정만은 받아들일 수 없다. 황제는 조상들이 내게 물려준 신성한 호칭이다. 집정 수락은 선조들에 대한 불충(不忠)이며 불효(不孝)다. 황제가 아니면 텐진(天津)으로 돌아가겠다.” 이타가키가 대안을 제시했다. “1년 후 헌법을 개정하고 의회에서 국가원수개정안을 통과시키면 된다.”
푸이 “과도기는 1년을 넘길 수 없다”
이튿날 새벽, 이타가키가 푸이의 측근 한 사람을 불렀다. “군부의 결정은 바꿀 수 없다. 집정을 거부하면 적으로 대하겠다.” 보고를 받은 푸이의 얼굴에 핏기가 사라졌다. 정샤오쉬의 아들이 푸이를 진정시켰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호랑이를 잡을 수 있다. 지금 우리는 일본인의 수중에 있다. 일본과 결별하면 후사를 도모할 수 없다. 1년간 고통과 치욕을 삼키자. 1년 후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퇴위를 선언하자.” 고개를 가볍게 끄덕인 푸이의 눈길이 정샤오쉬를 향했다. “이타가키를 만나라. 과도기는 1년을 넘길 수 없다.” 회담을 마치고 온 정샤오쉬의 보고는 간단했다. “이타가키가 동의했다. 오늘 밤 미래의 집정자를 위해 작은 연회를 준비했다며 참석을 간곡히 요청했다.”
그날 밤, 연회를 주관한 이타가키는 참석자 전원에게 일본 기녀(妓女)를 한 명씩 배정했다. 자신은 양옆에 기녀를 끼고 호기를 부렸다. 푸이 옆에 앉은 기녀는 말 없는 청년의 정체가 궁금했다. 어눌한 중국어로 말을 걸었다. “이 안에서 가장 젊은 사람이 너무 의젓하고 만면에 세월의 풍상이 가득하다. 원래 중국인이냐? 뭐 하는 사람이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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