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문화] 돌에 詩를 새기는 예의
돌에 시를 새기는 마음으로
아름다운 글, 돌에 새길 때는
예찬과 경계가 동시에 필요
돌에 새긴 시를 읽는다. 돌에 시를 새기는 마음으로 읽다 보면 한 획 한 획이 더 골똘해진다. “나뭇잎 하나가 // 아무 기척도 없이 어깨에 / 툭 내려앉는다 // 내 몸에 우주가 손을 얹었다 // 너무 가볍다” 천천히 읽는 이 시는 이성선 시인의 ‘미시령 노을’이다. 고성군 토성면 성대리에 있는 시인의 생가 뒤뜰에 이 시가 새겨진 시비(詩碑)가 묵직하게 서 있다. 어깨에 떨어지는 나뭇잎 하나로 우주의 기운까지 느끼는 시인의 감각이 놀랍다. 이 세계의 이치를 너무 빨리 알아버린 것일까. 동양적 달관의 깊이를 시 속에 품던 이 시인이 세상을 떠난 지도 벌써 스무 해가 지났다. 시인이 뛰놀던 뜰에 서서 시인의 감성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니! 돌에 시를 새기는 일이 이럴 땐 참 반갑고 고마운 일이다.
금강산 여행 코스 중 하나였던 ‘삼일포’도 사정은 비슷했다. 사실 ‘삼일포’는 이성선 시비가 있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다. 남북으로 갈라져 있지만, 행정구역도 두 곳 다 고성군이라는 점에서 뭉클해진다. 우리나라의 호수 중 가장 아름답다는 이 삼일포에도 글을 새긴 바위가 흔하다. 이념적인 문구는 여전히 거슬리지만, 선인들이 새긴 글은 후대 문인들의 시심을 자극하기도 했다.
“비와 갈을 새기는 일은 옛날에도 많았지만 / 이끼가 먹고 티끌이 침노해 글자는 갈수록 알아볼 수 없나니 / 어찌 손가락 끝의 천재의 피로 / 한 번 산돌들 적셔 없어지지 않음 만하랴”(김달진 역)라는 이 시는 고려 후기 문신이자 서예가인 김효인이 금강산 삼일포에 와서 지은 ‘삼일포단서석’(三日浦丹書石)이다. 이 시를 읽으면서 바위에 글을 새기는 것에 대해 나름 두 가지 상반된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것은 긍정적인 예찬과 부정적인 경계가 동시에 필요하다는 것이다. 돌에 새긴 글자는 이끼가 먹고 티끌이 침노해도 오래 읽힐 수 있다는 예찬의 의미와, 한 번 돌에 새긴 것은 쉽게 없어지지 않으니 가려서 하라는 경계의 의미가 그것이다.
인적이 드문 길목이나 파도가 한 번씩 쓸고 가는 해변에서 돌에 새겨진 아름다운 시구를 만나면 참으로 반갑다. 또한 방문객이 너무 많아 삭막해진 공원길에서 발길을 멈추게 하는 시비 또한 보는 이들을 즐겁게 한다. 남산을 오르다 보면 남산도서관 근처에서 소월 시비를 만난다. 소월의 ‘산유화’를 새긴 이 시비는 1968년에 세워졌으니 54년쯤 됐다. 그 긴 세월 동안 남산을 오르는 이들에게 돌에 핀 한 송이 꽃처럼 향기와 여운을 주고 있다. 남산의 모든 꽃이 다 진 후에도 혼자 차갑게 핀 이 시비는 그 모습 자체만으로도 우리 모두의 근원적인 고독을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시를 새긴 비석이라는 의미의 ‘시비’라는 말은 참 아름답다. 이 말의 의미가 훼손되지 않도록 막무가내로 돌의 영혼을 건드리는 일은 없어야 한다. 귀한 시로 돌을 활짝 피어나게 해야 할 것이다.
천수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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