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광우의시네마트랩] 변방에서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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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와 1980년대 초의 팝스타 올리비아 뉴튼 존이 별세했다.
올리비아 뉴튼 존은 음악적으로는 컨트리와 팝, 그리고 나중에는 디스코 댄스 음악도 소화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영미 팝계는 영국 출신과 미국 출신 가수들이 양분하던 시절이었는데, 올리비아 뉴튼 존의 등장 이후 호주 출신 팝 아티스트들도 주목받게 되었다.
올리비아 뉴튼 존이 등장하던 시기에 호주의 영화도 세계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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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비아 뉴튼 존이 등장하던 시기에 호주의 영화도 세계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조지 밀러의 ‘매드 맥스’(1979)가 나왔고 주연을 맡은 멜 깁슨은 할리우드로 진출해서 ‘리썰 웨폰’ 시리즈 같은 액션영화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밖에도 피터 웨어의 ‘행잉 락에서의 피크닉’(1975), 브루스 베레스포드의 ‘브레이커 모런트’(1980), 필립 노이스의 ‘뉴스프론트’(1978) 등과 같은 작품들이 흥행에 성공하고 평단의 주목을 받았다. 이들은 나중에 할리우드로 진출해서 비교적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았다. 할리우드에서 피터 웨어는 ‘죽은 시인의 사회’(1989), 브루스 베레스포드는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1989), 필립 노이스는 ‘패트리어트 게임’(1992) 같은 작품을 찍었다. 멜 깁슨 이외에도 샘 닐, 브라이언 브라운과 같은 배우들이 등장했다. 이 시기에 등장한 이 감독들의 작품을 세계 영화사에서는 ‘호주 뉴웨이브’라고 부른다.
영어를 사용하는 나라이지만 호주는 영국과 미국에 비해 문화적으로 주목받지 못했다. 올리비아 뉴튼 존과 이들 호주 뉴웨이브 세대 덕분에 단번에 호주의 대중문화는 변방에서 중심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이들은 호주의 문화적 특성을 제대로 발휘하기보다는 미국 대중문화계에 흡수되었다. 그래도 올리비아 뉴튼 존은 호주 출신 대중 문화인들의 미국 진출을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삼가 조의를 표한다.
노광우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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