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공감은 착하기만 할까..공감에 공감만 할 수 없는 이유[인스피아]

김지원 기자 입력 2022. 8. 12. 2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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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의 시대, 공감을 고찰하다
이 글은 인문교양 뉴스레터 <인스피아>에 실린 내용을 수정한 것입니다. 더 많은 글을 보고 싶으시다면 오른쪽 QR코드를 촬영하거나, 포털에 ‘인스피아’를 검색해서 구독해주세요.
우리편의 강한 ‘공감’이 한 사람의 무고한 희생자를 만들어냈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영화 <모리타니안>(2021)의 포스터. <모리타니안>의 군 검찰관 카우치 소령(베네딕트 컴버배치)은 사건을 조사하다 모하메드 울드 슬라히가 무죄이며 극심한 고문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혼란에 빠진다. STXfilms 제공
‘공감’ 아니면 ‘화나요’로 감별되는 온라인 세상
나면서부터 ‘쌤통’도 ‘돈쭐’나야 할 성자도 없다
그가 공감할 만한지는 그의 타고난 권리와 무관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가진 변호사 우영우의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가 큰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독특한 매력을 가진 우영우에 사람들은 공감했습니다. 한편 지난달 26일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가 공식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우영우에 공감하지만 전장연 시위엔 냉소적인 시민들을 비판한 만평을 발표한 이후 각 온라인 커뮤니티는 이를 비난하는 글로 가득해졌습니다. 그중에서도 제 눈길이 머물렀던 한 댓글이 있습니다.

“공감도 공감할 만한 사람한테 공감을 하는 거지. 우영우가 지하철을 막았나? 피해주는 시위를 하면서 공감을 바라는 게 말도 안 된다.”

‘공감할 만한 사람’이라는 단어에 생각이 머물렀습니다. 공감할 만한 사람이란 무엇일까, 공감받기 위해서 어떤 요건을 만족해야 하는가, 공감할 만하지 않은 사람은 권리가 없는가 등의 물음이 꼬리를 물었습니다.

공감의 시대입니다. 공감을 강조하는 책이나 강연들이 쏟아집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구체적으로 ‘누구에게’ 공감할 것인지에 대해선 논의가 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불쌍’한 아이에겐 쉽게 공감하지만, 치안을 ‘위협할 수도 있는’ 이민자나 ‘수업권을 침해’하는 노동자의 시위에는 공감을 차단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공감할 만하지 않은’ 사람들은 자연스레 정당성과 그들의 권리를 잃게 됩니다.

공감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사람들은 쉽게 무시되어온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는 어쩌면 안에 든 물건이 마구 빠져나가는데도 리어카를 끌고 가는 것과 비슷한 일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공감할 만한’ 사람에게만 공감하면 되는 걸까요? 그런 공감이 많아지면 우리 사회는 좋은 사회가 될까요? 오늘 레터에선 공감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는 책들(나가이 요스케 <공감병>, 폴 블룸 <공감의 배신> 등)을 지팡이 삼아 공감에 대해 해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도저히 싫은 사람에게’ 공감할 수 있을까

우리가 보통 누군가에게 공감한다고 할 때를 떠올려봅니다. 아마도 ‘공감받을 만한’ 행동을 했거나, 눈물나는 사연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하지만 상대가 내게 적대적이거나 피해를 입힐 수도 있는 사람이라면 우리는 그에게 쉽게 공감할 수 있을까요?

일본의 민간 비영리 단체(NPO) ‘억셉트 인터내셔널’ 대표 나가이 요스케는 아마도 이런 고민을 가장 치열하게 하는 사람 중 한 명이 아닐까 싶습니다. 테러와 분쟁의 해결을 사명으로 하고 있는 억셉트 인터내셔널은 소말리아 테러단, 투항자를 구호하고 이들을 갱생, 교섭하는 업무를 맡고 있거든요. 그는 전 세계에서 가장 공감받기 어려울 만한 사람들과 꾸준히 소통하고 있는 인물입니다.

그가 쓴 책 <공감병>의 부제는 ‘공감 중독 시대를 살아가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그가 말하는 핵심 메시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공감이 중요하긴 하지만 ‘상대를 나처럼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돕고 연대한다’는 사고구조에선 ‘도저히 나처럼 생각할 수 없는 상대’ 혹은 ‘내가 좋아하지 않는 상대’에 대해서는 공감 능력을 발휘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가 누군가의 비극을 보았을 때 공감보다도, 누군가의 권리로서 접근을 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우리가 누군가의 비극을 봤을 땐
공감할 만한지가 아니라
누군가의 권리로 접근해야 한다
- 일본 NPO 활동가 나가이 요스케 ‘공감병’ 中

나가이는 여러 번 “예를 들어~”라고 운을 떼며 “○○에게 공감할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독자에게 던지는데요. 질문의 난도가 너무 높아서 자주 곤란해집니다. 예를 들면 도박으로 모든 재산을 날린 60대 무일푼 남성, 붙임성 없고 과묵한 전 테러단 일원 등입니다. 그는 “남루한 노인이든 어린아이든 인간으로서 겪는 굶주림이라는 고통은 다를 바 없”기 때문에 그가 어떤 사람이냐에 관계없이 인권을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했습니다. 보통 포털사이트의 기사, 커뮤니티 글 속 수많은 사람들의 사연은 ‘공감’ 아니면 ‘화나요’로 수렴되곤 합니다. 마치 옆구리에 바구니 두 개를 차고 화나는 내용인지 공감할 내용인지를 감별해, 공을 한쪽 바구니에 던져넣는 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는데요. (30대 파산자라고? 알고보니 부모님을 혼자 부양하고 있어? 그런데 코인 투자를 해서 빚을 졌다고? - 왼쪽!)

<공감병>을 쓴 저자 나가이 요스케(오른쪽). 그는 테러와 분쟁의 해결을 사명으로 하고 있는 민간 비영리 단체(NPO) ‘억셉트 인터내셔널’의 대표로, 소말리아 테러단, 투항자 등을 구호하고 이들을 갱생 혹은 교섭하는 업무를 맡고 있다. 억셉트 인터내셔널 공식 홈페이지

결과적으로 ‘공감 바구니’에 공이 들어가기 위해서는 이 사람은 대체로 ‘순결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예를 들면 기초수급자인데 월 10만원 넘게 술·담뱃값으로 써버리거나 공짜 급식을 먹으며 반찬 투정을 하거나, 시위를 하는데 남에게 피해를 준다거나 했다면 곧바로 자업자득이라며 공감 스위치를 내리곤 하죠.

조금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나면서부터 평생 ‘쌤통’인 사람도 없고 ‘돈쭐’나기 위해 태어난 성자 같은 사람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공감과 자업자득 사이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공감할 만한지, 아닌지는 그의 타고난 권리와는 무관한 일입니다.

나가이는 이어 “‘모두의 인권을 지키자!’ 같은 아름다운 구호보다 ‘말하기도 싫고 어떤 관계도 맺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도 기본적인 권리는 있다’는 정도가 심성에 깃들어 있는 게 좋지 않을까”라고 질문하며 “증오가 휘몰아치는 지금의 세계를 더 나은 것으로 만드는 열쇠는 공감이 아닌, 권리에 대한 이성적 시선”이라고 말합니다.

■‘나에게’ 공감하는 사람들

나와 내 주변에만 공감하는 ‘공감 과잉의 시대’
본능적 감정이 흐르는 대로 두면 공감도 편향
때론 의도적으로 공감의 작동을 차단할 필요 있어

공감 과잉의 시대엔 공감의 껍질을 쓰고 ‘나와 내 주변’에만 공감하는 사람이 늘고 있습니다.

예일대 심리학과 교수인 폴 블룸은 <공감의 배신>에서 공감의 부작용에 돋보기를 가져다댑니다. 공감만이 사회적으로 지나치게 강조될 경우 잘못된 결과를 낳기 쉽다는 것이죠. 우리는 “모두에게 공감해야 한다”고 착한 말을 하지만 실제로 공감은 그런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는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본능입니다. 블룸은 “사실은 (공감이 부족해서 문제라기보다는) 공감이 과해서 문제가 되는 경우가 더 많다”고 강조합니다. 엄밀하게는 나와 우리편에 대한 공감입니다.

사실은 공감이 과해서
문제가 되는 경우가 더 많다
- 예일대 심리학과 교수 폴 블룸 ‘공감의 배신’ 中

블룸은 공감을 스포트라이트에 비유하는데요. 마치 작은 손전등을 꺼내어 비추면 동그랗게 빛이 닿듯, 사람에게는 누구나 자신에게 친숙하고 가까운 것에 공감하기 쉽다는 거죠. 실제로 한 조사에 따르면 인종에 따라 공감의 정도에 차이가 있었다고 하고요. 2007년 연구에 따르면 미국 언론에 재난이 보도되기 위해선 유럽에선 평균 1명이 사망해야 하지만, 아시아나 아프리카에선 평균 43~45명이 사망해야 한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이 평소에는 별 문제가 없어보일 수도 있습니다만, 전쟁 같은 극도의 갈등 상황에선 달라집니다. ‘우리편에 대한 공감’이 어떻게 상대를 향한 혐오로 이어지는지를 고려하면 말이죠.

예를 들어 지난 3월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제이 캐스피언 강은 우크라이나 전쟁 관련 SNS에 과하게 많은 ‘공감’ 영상, 고양된 지지 메시지들이 오가는 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만약 이라크 전쟁 당시에도 틱톡이 있었다면 “우리는 갈색 피부의 희생자들에게도 똑같은 정도로 공감할 수 있었겠는가?”라고 말하면서요. 만약 그게 안 된다면, 때론 제3자로서 균형을 잡아야 하는 국제 사회에서 어느 한쪽에 편향된 지지를 보낼 위험이 있는 것입니다.

공감의 이런 편향성 때문에 블룸은 결국 본능적 감정이 흐르는 대로 맡겨둔다면 자연스럽게 “우리가 도저히 공감할 수 없는 이들에겐 공감할 수 없게 된다”고 말합니다. 이 때문에 때론 의도적으로 ‘(자연스러운) 공감의 작동을 차단’할 필요성도 있다는 것이죠.

저는 이 대목에서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모리타니안>(2021)이 떠올랐습니다. 이 영화에는 9·11 테러 이후 오사마 빈 라덴과 내통했다는 누명을 쓰고 관타나모 수용소에 재판도 없이 수용돼 극심한 고문을 당했던 실존 인물 모하메두 울드 슬라히가 등장합니다. 군 검찰관인 카우치 소령은 조사 끝에 슬라히가 무죄이며 부당한 고문을 당했다는 것을 폭로하려 합니다. 이에 테러로 동료를 잃은 미국 군인들은 차가운 눈으로 카우치 소령을 “배신자”라고 읊조립니다. 블룸의 렌즈를 끼고 이 영화를 본다면, 여기서 미국 군인들은 공감 능력이 부족한 게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편의 희생에 지나치게 공감했기 때문에 슬라히에 대해선 공감하지 않기로 결정한 것이죠. 블룸은 이처럼 공감이 얼마든지 자신을 중심으로 ‘조절 가능하’며 이 때문에 자주 현실을 왜곡한다고 지적합니다.

‘타인의 신발을 신어본다’는 공감의 본래 취지를 생각해본다면 이것은 ‘남의 신발을 신어보기’는커녕 ‘내 신발끈을 한층 더 단단하게 매기’에 불과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공감이 훌륭하다! 라는 말을 넘어 구체적으로 우리가 누구에게 공감할 것인가를 논하지 않는다면, 공감이라는 말은 엉망진창으로 쓰이기가 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현재 ‘공감 과잉’ 사회에서 혐오가 판치고 있는 이유는 아닐까 생각해보았습니다.

■바지를 들고 있어서 하는 시시한 공감

“나는 그가 양손에 바지를 붙잡고 있어서 총을 쏘지 않았다. 나는 ‘파시스트’를 쏘려고 여기 왔다. 하지만 바지를 붙들고 있는 사내는 ‘파시스트’가 아니었다. 그는 분명히 당신과 같은 인간이었다. 당신도 그를 쏠 마음이 안 생겼을 것이다.”

조지 오웰은 스페인 내전에 참가했을 당시의 체험을 쓴 에세이 <스페인 내전을 돌아보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에스카의 인근 평지에서 마주친 파시스트 병사는 당시 옷을 반쯤 입은 채 바지를 양손으로 붙잡고서 저 멀리 뛰어가는 중이었고요. 오웰은 그를 쏘지 않았습니다.

맞닥뜨린 병사가 알고보니 사실은 엄청난 양심의 소유자라거나 도움을 줄 만큼 가엾거나,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기구한 인생사를 지니고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저 그가 양손에 바지를 붙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에게 공감하는 이유는 그 정도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심지어 그가 적군의 옷을 입고 있는 병사이며, 그가 만약 그 순간 잡고 있었던 것이 바지가 아니라 총이었다면 조지 오웰 자신이 죽을 수도 있었음에도 말입니다.

우영우처럼 훌륭하게 일하고 성실하게 자신의 삶을 사는 사람은 ‘공감할 만한’ 장애인이고, 나의 권리를 침해하는 사람은 ‘공감하지 않아도 되는 나쁜’ 장애인일까요.

묵묵히 어떤 상황에서도 아무런 말 없이 일하는 청소노동자는 ‘공감할 만한’ 노동자이고, ‘시끄러운’ 시위로 나의 권리를 침해하는 사람은 ‘공감하지 않아도 되는 나쁜’ 노동자일까요. 애초에 내 공감이 그렇게 중요한 문제도 아닙니다. 놀랍게도 내가 공감을 하든 안 하든 그들에게는 나와 마찬가지로 권리가 있습니다. 그 권리는 때로 서로 부딪치면서 조율을 해나가는 것이 당연합니다.

우리 사회에는 더 많은 공감이 필요합니다. ‘공감할 만한’ 사람에게 하는 공감이 아니라, 상대방이 단지 바지를 붙들고 있어서 공감하는 정도의 시시한 공감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좋아요’만 ‘공감’이 아닌 것입니다.

김지원 기자 deepdeep@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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