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우로 도로 파이고 앞 안 보여도..배달·택배노동자 '업무 중단' 못해

유경선 기자 2022. 8. 12. 2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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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배사들 '배송 연기' 규정 없어
사고 잦아도 "조심하라"는 말만
재해 때 '작업중지권' 보장 필요

1년째 오토바이로 배달일을 하는 김태완씨(44)는 폭우가 쏟아진 지난 8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인근에서 사고를 당했다. 거센 비에 도로가 파인 ‘포트홀’에 오토바이 앞바퀴가 빠졌다. 그는 “비가 많이 와서 시야 확보가 안 되다 보니 도로가 파여 있는지도 몰랐다”고 말했다.

지난 8일부터 이틀간 수도권에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졌지만 배달·택배노동자들은 악천후를 뚫고 할당된 물량을 소화할 수밖에 없었다. 시야 확보가 어려울 정도로 비가 많이 내리고 도로가 잠기더라도 업무 중단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가 없기 때문이다. 폭우·폭설 등 자연재해가 닥쳤을 때 노동자들이 작업중지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명문화된 규정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12일 경향신문 취재 결과 롯데글로벌로지스, CJ대한통운, 한진택배 등 대다수 택배사들은 기상 상황이 악화돼도 배송을 중지 또는 연기할 수 있는 내부 규정이 없다.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쿠팡지부에 따르면 전자상거래업체 쿠팡에도 이와 관련된 별도의 매뉴얼이 없다. 배달노동자들의 처지도 별반 다르지 않다. 포괄적인 안전수칙만 있을 뿐 노동자들을 위한 보호장치는 없다.

노동자들은 “앞이 안 보일 정도로 비가 온다”고 호소해도 관리자가 “조심하라”고 말하는 수준이라고 한다. ‘잠시 정차 후 안전을 확보한 뒤 배송을 진행하라’는 식의 구체적인 규정이 없다는 것이다. 정진영 민주노총 쿠팡지부장은 “회사가 집중호우에도 물량 주문을 평소대로 받았다”며 “불어난 물에 고립됐지만 배수가 다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물량을 다 소화하고 퇴근한 노동자들도 있다”고 했다.

배달·택배노동자들에게 집중호우는 상존하는 위험이다. 2011년 7월 차선우 집배원은 경기 용인시에서 폭우 속에 우편물을 배달하다가 빗물이 만든 급류에 휩쓸려 사망했다. 2016년 7월에는 경북 청송군에서 배범규 집배원이 폭우 속에 오토바이를 몰고 우편 배달을 하다가 교통사고로 순직했다.

집배원들의 경우 민주노총 전국집배노동조합의 문제제기로 ‘우편물 이용제한 및 우편업무 일부 정지에 관한 고시’가 2018년 신설됐다. 위험도에 따라 배송 지역을 1급지부터 3급지까지 분류하고, 기상 경보와 주의보 발령 정도에 따라 총괄우체국장이 집배 업무를 정지할 수 있다.

그러나 민간 영역인 배달·택배노동자들에게는 이 같은 규정이 아직 없다. 노동자들은 물량을 쥔 플랫폼 업체들이 주도해 안전을 지킬 수 있는 ‘체계’를 만들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김태완씨는 “(배달을) 수락하면 거의 무조건 가야 하고, 취소는 현실적으로 어렵다”며 “배달을 수락했더라도 플랫폼이 고객들에게 사과나 양해 공지를 더 적극적으로 해서 배달 시간을 늦추거나 취소할 수 있게 대처해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박정훈 라이더유니온 위원장은 “기상이 악화될 때 노조가 작업중지를 요청하면 플랫폼이 즉시 검토할 수 있게 하는 내용으로 쿠팡이츠와 교섭하고 있다”고 말했다.

민주노총 전국택배노동조합은 지난 9일 각 택배사들에 ‘폭우 등 천재지변으로 인한 업무불가 통보 및 대책 마련 촉구의 건’이라는 제목의 공문을 보냈다. 심각한 재난 상황에서는 집배와 배송 업무가 가능해질 때까지 작업을 중지하겠으니 사측에서 대책을 마련해달라는 내용이다. 그러나 노조의 이 같은 요구에 택배사들은 아직 회신하지 않고 있다.

한선범 택배노조 정책국장은 “각 택배사별로 단체협약을 통해 폭우 등 위험한 자연재해 상황에 준할 때 배송을 연기하거나 중지하는 것을 명문화해야 한다”고 했다.

유경선 기자 lightsu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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