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군국주의 화신.. 그는 진짜로 죽었을까

박성준 입력 2022. 8. 12.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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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태지역 전쟁 불구덩이 내몬 A급 전범
당시 日 권력 정점 도조 히데키 실체 해부
'국가는 병영·국민은 군인화' 신념 아래
日 국민 정신·육체 길들이고 희생 강요
우경화 日, 반성 없이 '과거의 영광' 집착
저자 "도조 히데키 낳은 역사 제대로 알고
日사회서 극복할 때 그는 정말로 죽을 것"

도조 히데키와 제2차 세계대전/호사카 마사야스/정선태 옮김/페이퍼로드/3만3000원

일본 군국주의의 화신, 태평양전쟁 A급 전쟁범죄자 도조 히데키(1884~1948)의 말로는 어떠했을까. 일본 패전 후 권총 자살을 시도했지만 실패하고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아 교수형에 처해졌다. 논픽션 작가 호사카 마사야스가 6년에 걸쳐 자료를 수집하고 관련자 수백 명을 만나 추적한 그의 종말은 훨씬 더 상세하다.
태평양전쟁 전범자를 단죄하기 위해 1946년 5월 3일부터 2년 6개월 동안 일본 도쿄에서 열린 극동국제군사재판 법정에서 도조 히데키가 통역을 듣기 위해 헤드폰을 머리에 쓰고 있다. 일본 군국주의의 화신, 태평양전쟁 A급 전쟁범죄자 도조 히데키는 패전 후 권총 자살을 시도했지만 실패하고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아 1948년 12월 23일 교수형에 처해졌다. 페이퍼로드 제공
1945년 8월 15일 정오 도조 가족은 다다미가 깔린 방에 하녀, 호위 병사 등과 함께 정좌하고 천황의 항복 선언을 라디오로 듣는다. 이후 며칠간 도조 집에는 결사 항전을 요구하는 방문객이 줄을 이었다. 그러다 흐름이 바뀌면서 20일부터는 자살을 권하거나 죽이겠다는 협박장이 날아들어 산더미처럼 쌓였다. 메모광이었던 도조는 40년간 작성한 메모와 노트를 마당에서 불태웠다. 일본 육군상 겸 수상 시절에도 작성했던 역사적 사료는 사흘 동안 태워져 연기로 바뀌었다. 가족에겐 이 말을 되풀이했다. “도조 히데키의 공과 죄에 대해서는 백년 후 역사가의 판단을 기다리겠다. 그때에는 알아줄 것이다. 나는 그러리라고 믿는다.”

패전 선언 후 책임있는 자들은 연이어 자결했다. 도조의 자결도 당연시되는 분위기였다. 심지어 차남조차 “함께 자결하자”고 할 정도였다. 도조는 “죽는 것보다 살아 있는 것이 낫다. 조금 더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말했다. 일본 내부는 물론 맥아더의 점령군 사령부 측에서도 곧 열릴 전범재판에서 천황 대신 책임을 져야 할 도조는 살아있어야 했다. 결국 그를 잡아들이기 위해 미 점령군 헌병이 자택을 에워싸면서 도조 자살 미수 사건이 벌어진다.

연합군이 체포 대신 사살을 택할까 두려워했던 도조는 집을 포위한 미 헌병이 현관문을 두드리자 간단한 문답 후 문을 걸어 잠근다. 그리고 미리 동그라미를 그려둔 심장 쪽으로 권총을 발사한다. 하지만 왼손잡이인 데다 발사 순간 권총이 위로 들리는 바람에 탄환은 심장을 비껴갔다. 마침 현장에 동행했던 일본 기자에게 도조는 이렇게 말한다. “한 방에 죽고 싶었다. 시간이 걸린 것이 유감이다….대동아전쟁은 정당한 싸움이었다. 국민과 대동아 민족에게는 정말로 안타까운 일이다.” 도조가 이송된 병원 일본 의사는 환자를 살릴 생각이 없었다. 그를 살린 건 맥아더가 보낸 미국인 의사와 미국인 병사의 헌혈이었다. 일본 여론은 도조가 말만 그럴싸하게 했을 뿐 실제로는 의지가 약해 철저하게 마무리하지 못해 추태를 보인 것으로 여겼다.

전범수용소에서 도조는 치과 치료를 받았는데 미측 기공사는 그의 틀니에다 ‘진주만을 기억하라(Remember Pearl Harbour)’의 머리글자인 ‘RPH’를 새겨넣었다. 이 같은 야유를 도조는 몰랐다. 1946년 5월 3일부터 2년 6개월 동안 열린 도쿄재판 법정은 도조에게 교수형을 선언한다. 정장차림으로 죽음을 맞이하고 싶다는 전범들 희망은 이뤄지지 않았다. 대신 도조를 비롯한 7인의 전범은 감옥(Prison)을 뜻하는 ‘P’가 박힌 미군 작업복을 입고 1948년 12월 23일 자정 무렵 형장에 들어갔다. 일본 쇼와 시대를 다룬 저작물이 무려 150여권이라는 치밀한 논픽션 작가인 저자는 유년시절부터 샅샅이 도조 실체를 밝히는 데 주력한다.
호사카 마사야스/정선태 옮김/페이퍼로드/3만3000원
도조는 육군중앙유년학교, 육군사관학교, 육군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의 요직을 두루 거쳐 수상에까지 오른 전형적인 ‘정치군인’이었다. 그의 화려한 이력은 1942년 수상, 육군상, 육군참모총장을 겸직하면서 절정에 이른다. 1937년 관동군 참모장으로 근무하면서 중일전쟁(지나사변)을 직접 경험한 그는 1941년 12월 진주만 폭격 이후 확대된 전쟁을 실질적으로 주도하면서 아시아·태평양 지역을 전쟁 속으로 몰아넣는다.

저자는 도조의 실체가 드러나야 하는 이유로 ’반성’을 꼽는다. 아시아 전체를 전쟁의 불구덩이에 밀어 넣은 근대 일본 정치의 한계를 도조 히데키나 몇몇 전범에게만 뒤집어씌워선 안 된다는 지적이다. “이 군사 지도자는 정치와 군사의 관계에 대해 무지했고 국제법규에도 거의 관심을 갖지 않았다. 군인이야말로 ‘선택받은 백성’이라고 생각한 그는 국가를 병영으로 바꾸고 국민을 군인화하는 것을 자신의 신념으로 여겼다. 그런 그는 적어도 20세기 전반의 각국 지도자들과 비교하면 너무나도 보잘것없는 인물이었다. 왜 이러한 지도자가 시대와 역사를 움직였던 것일까. 그것이 바로 이 나라가 가장 심각하게 반성해야 할 문제다.”

일본에선 도조를 미화한 영화가 흥행작이 되고 도조 손녀가 출마하는 등 과거 잘못을 반성하기보다는 과거 영광을 되찾으려는 움직임이 뚜렷하다. 우파 민족주의가 90년대 이후 30여 년 동안 세력을 확대하면서 일본 사회는 우경화되어 가고 있다. 도조 히데키의 전쟁 범죄 행위가 “서양의 침탈 아래 신음하는 아시아 민족들을 해방하고 궁극적으로 아시아가 평화롭게 공존하는 ‘대동아공영권’을 실현하기 위한 전쟁이었다”고 옹호하는 사람들도 나타났다. 집권 여당인 자민당에서는 헌법에서 전쟁 금지 조항을 지우고 자위대를 국가 군대로 공식화하는 개헌을 추진하려고 애쓰고 있다. 개헌을 실행하기까지는 아직 많은 산이 남아 있지만, 최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 이후 일본도 평화 헌법에서 벗어나 군대를 가지자는 여론이 늘고 있다. 저자 호사카 마사야스는 도조 같은 독재자를 낳은 일본 역사를 모두가 바로 알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도조와 같은 지도자가 어떻게 일본 국민정신과 육체를 길들이고 동원했는지가 모두에게 공유될 때 비로소 도조가 진짜로 매장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1948년 12월 23일 오전 0시 1분, 도조는 64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어느 날엔가 ‘도조 히데키’는 다시 한 번 죽을 것이다. 그로 상징되는 시대와 그 이념이 다음 세대에 의해 극복될 바로 그때 그는 정말로 죽을 것이다. 도조 히데키를 정중하게 매장하는 것은 다시 말해 공과 죄를 물어 매장하는 것은 다음 세대에 부여된 권리이자 의무이다. 하지만 그것이 언제일까.”

박성준 기자 alex@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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