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도로스로 최연소 선장..고대 로스쿨 교수된 사연은

정희영 2022. 8. 12.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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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end Interview] 최연소 선장에서 법학자로..김인현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김인현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선장 시절 불의의 사고를 당한 경험을 딛고 국내 최고 해상법 전문가가 됐다. 김 교수가 서울 성북구 고려대에서 해도와 자신의 책을 보여주며 웃고 있다. [이충우 기자]
1991년 2월, 호주 남서쪽 해안에서 한 척의 배가 암초에 걸렸다. 기존의 해도에는 산호초가 자라면서 만들어진 이 암초가 나타나지 않았다. 호주 정부에서는 새로 암초가 나타난 사실을 알렸으나 항해사는 해도에 반영하지 않았다. 선장도 이 사실을 확인하지 못했다. 배는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상태가 됐다.

예인선이 오려면 일주일이 필요했다. 파도가 치며 배는 점점 더 가라앉았다. 암초에 고립된 지 이틀째, 선장은 전원 퇴선을 명령했다.

배는 일본 '산코'사의 하베스트(Harvest)호. 배의 선장은 당시 최연소 선장으로 승승장구하던 김인현 현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였다. 사고를 겪고 그의 삶은 급격히 바뀌었다. 32세의 나이에 호주 시드니 법정에 증인으로 서게 됐다. 침몰한 배의 선장으로 배 등기 말소까지 뒤처리를 맡아야 했다. 무기력증도 찾아왔다. 집 밖을 나서기도 힘들었지만 명심보감을 보며 마음을 다잡았다. 법학 공부는 그에게 탈출구였다. 해상법을 공부해 자신과 같이 불행한 사고를 당한 선장들에게 도움을 줘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1년간 공부를 거쳐 고려대 법학과에서 석사과정을 시작했다. 김앤장법률사무소에서의 경력을 거쳐 박사 학위를 받고 대학교수로 자리를 잡았다. 국내 대표적인 해상법 학자로 올라서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의 스터디클럽 '바다, 저자와의 대화'에선 해운업과 조선업 등 바다와 관련된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의견을 나눈다. 멤버만 650명에 달한다. 매일경제는 활발히 언론 기고와 저서 집필을 통해 현안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는 김 교수를 만나 인터뷰했다. 아래는 일문일답.

―선장 출신 법학자라니 독특하다.

▷우리나라에는 해상법 전문가 자체가 드물다. 유럽에는 그래도 선장 출신 해상법 학자들이 꽤 있었다. 그런데 최근에는 유럽 사람들이 직접 배를 타는 일이 드물다 보니 선장 출신 학자가 잘 나오지 않고 있다. 지금은 내가 전 세계적으로 가장 원로급 캡틴 출신 법학 교수다.

―뱃사람의 길을 처음 걷게 된 계기는.

▷집안이 원래 수산업을 했다. 1959년에 이미 어선이 세 척이었다. 꽤나 부유한 집안이었다. 그런데 배 한 척이 좌초되며 사업에 타격을 받고, 다음해에는 고기가 잘 잡히지 않으며 집안이 기울었다. 어선이 나가는 데는 인건비가 나가고 기름이 필요한데, 돈은 돈대로 들고 고기도 안 잡힌 것이다. 그렇게 그 많던 재산이 다 사라지고 없어졌다.

서울에 가서 대입 재수를 하고 있는데 '세계의 대학'이라는 책을 보게 됐다. 거기에 한국 대학으로는 서울대와 한국해양대만 나왔다. 당시엔 국비로 지원되는 곳이기도 했다. 그렇게 해양대에 진학했고 졸업 후 배를 타다 보니 선장까지 진급했다.

―당시 회사에서 최연소 선장이었다.

▷일본 회사 산코기센에서 근무했다. 선원 국적은 일본인, 한국인, 대만인, 유럽에서 온 사람 등 다양했다. 해양대 출신이면 사관학교를 나온 셈이다. 기본적으로 엘리트인 셈이다. 거기에 1등항해사 때 타게 된 배가 있었는데, 생명수당 지급이 안 됐다. 강하게 항의해 결국 본사로부터 선원 모두가 수당을 받고 타게 됐다. 그 모습을 사람들이 좋게 봐줬다. 선장을 할 만한 배짱이 있다는 것이다. 1년 더 빨리 선장이 될 수도 있었는데, 얼굴이 너무 어려 보인다고 해 1년을 더 항해사로 일했다.

―장기간 항해하다 보면 흔히 체험하지 못할 일들도 많이 겪을 듯하다.

▷시차 때문에 하루에 30분씩이 사라진다. 시간 조정하는 걸 깜빡해 자기 당직 차례는 30분 뒤인데 올라오는 경우도 많다. 가장 길게 항해한 것은 45일이었다. 대만에서 노르웨이까지 가는 항로였다. 장기간 항해하다 백야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쯤 항해하다 보면 다들 이상해진다.

―위험한 순간도 있었을 텐데.

▷좌우로 흔들리는 건 괜찮다. 위협적인 상황은 배가 앞뒤로 움직일 때다. 파도에도 길이가 있다. 해변에서 보면 얼마 안 되지만, 북태평양 같은 곳에선 파도 길이가 150m에 달한다. 배 길이가 보통 150m 정도다. 완전히 파도를 타버리는 거다. 올라갈 때는 괜찮은데 내려갈 때 보면 또 거대한 파도가 저 위에 보인다. 그럴 땐 완전 죽었다 싶은데 또 그 파도를 타고 올라간다.

―사고는 어떻게 났나.

▷플로리다 탬파에서 비료를 싣고 파나마운하를 통과해 호주 남부로 가는 항로였다. 그런데 우리 해도를 담당하는 2등항해사가 호주 정부에서 알려줬는데 업데이트하는 걸 깜빡했다. 산호초는 자라서 암초가 되기 때문에 호주 정부에서 측량해 알려주는데 그걸 표시하지 않은 것이다. 원래 해도는 그렇게 계속 업데이트한다. 당시 사용하던 해도는 1890년도에 만든 걸 업데이트해오던 거였다. 물론 최종 책임은 선장에게 있다. 나도 그걸 확인하지 못했다. 배가 그 암초 위로 올라가버리며 움직이지 못하게 됐다. 육지로부터 13마일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예인선이 있었으면 건질 수 있었는데, 당시 싱가포르에 있어 오는 데만 7일이 걸렸다. 파도가 계속 들이치며 배가 점점 가라앉았다. 이틀쯤 된 시점에 배를 포기해야겠다고 판단하고 전원 퇴선 명령을 내렸다.

―충격이 컸겠다.

▷지금은 이렇게 쉽게 얘기하지만, 선장이 퇴선 명령을 하는 건 사단장이 자기 부대를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아주 불명예스러운 일이다. 그렇게 필요한 것만 들고 육지로 갔다. 배는 곧 두 동강이 나 가라앉았다. 지금은 그곳이 스쿠버다이빙 명소가 됐다.

―사고 이후엔 어떻게 됐나.

▷사고 조사를 받았다. 선원은 다 안전히 돌아왔다. 배만 침몰했기에 보험금을 받았다. 그런데 싣고 있던 비료가 물에 다 녹으며 비료 주인이 회사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그때 32세였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어린 나이지 않나. 결혼한 지 얼마 안 돼 생긴 사고였다. 정신적으로 감당이 되지 않았다. 집에 와 있는데 소송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더럭 겁부터 났다. 법정에 안 나가려고 했는데 해양대의 명예까지 문제가 될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렇게 호주 시드니에 있는 법정에 출석했다.

―그게 법학을 공부하게 된 계기가 됐나.

▷그렇다. 상대방 측에 변호사와 함께 선장이 있었다. 말하자면 우리를 공격하는 역할이었다. 선장 경력을 바탕으로 말하는 것을 보고 내가 변호사가 되거나 해상법을 공부하면 사고 난 선원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가 김포공항 활주로에 내렸다. 마침 창 옆에 앉아 있는데 비행기가 내리는 순간에 활주로에서 벗어나지 않고 멈추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게 느껴졌다. 기장은 그 순간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거기서 각오를 했다. 이 순간의 기장처럼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것이었다. 그 마음가짐으로 지금까지 거의 30년 동안 살아오고 있다.

―사후 처리 과정이 남아 있었을 텐데.

▷침몰한 배의 선장으로서 뒤처리를 해야 했다. 소송이 마무리되고 배 등기 말소가 이뤄지기까지 1년이 걸렸다. 그동안은 기본급을 받으며 생활했다. 너무 무기력해져 하나의 목표를 정해 마음을 다잡겠다고 생각했다. 1년을 준비해 고려대 법학 석사과정에 합격했다. 생활비가 없어 고향 후배에게 500만원을 빌려 생활비에 보태 쓰기도 했다.

―김앤장법률사무소에서도 근무했다.

▷세 학기를 마치고 석사 학위 논문을 작성해야 하는 시점이었다. 생계가 막막해 뭐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마침 김앤장에서 연락이 왔다. 영국의 해상 로펌과 경쟁하기 위해서는 선장 경력에 법학 소양을 갖춘 사람이 필요하다고 했다. 처음엔 '해양실장'이라는 직책을 주겠다고 했다. 그래서 반발했다. 변호사도 변호사 자격증을 갖고 전문가로 일하는데, 저도 갑종 선장 면허가 있는 선장이니 선장으로 불러달라고 했다. 보수도 국내 해운사 선장에 맞춰 달라고 했다. 조건을 모두 맞춰주겠다고 해 김앤장에서 근무하게 됐다.

―주로 어떤 업무를 담당했나.

▷주로 충돌 사고였다. 배 한 척이 1000억원 정도 되다 보니 과실 비율에 따라 오가는 돈이 커진다. 그런데 변호사는 항해 방법을 모르니 과실 비율을 산정하기 어렵다. 나는 또 사고로 조사를 당해보지 않았나. 영문으로 보고서를 썼는데 '아 이건 바닷물 냄새가 난다'며 화제가 됐다. 실제 경험한 사람만이 쓸 수 있는 내용이 담긴 것이다. 난파선 선장이라는 초라한 신세에서 3년 사이에 인터뷰하는 사람이 됐다. 1년이 지나자 벌써 영국에서는 유명해졌다. 영국에서 한국 해상 사건은 김앤장의 팀장 변호사와 캡틴 김이 다 하고 있다는 기사가 나온 것이다. 그렇게 국내외에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기고와 집필 활동도 하고 있다.

▷해상법이 이렇게 중요한데, 사실 해운업 종사자들은 사고가 나기 전까지는 해상법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교수가 되면서 해운계 종사자 모두에게 주의해야 할 사항들을 알려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기고와 집필 활동을 활발히 하는 것이다. 업계에 경각심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나름대로는 사고 뒤에 가졌던 마음가짐을 유지하고자 하는 의미도 있다.

―최근에는 주로 어느 부분에서 해상 분쟁이 발생하고 있나.

▷컨테이너 운임이 많이 오르고 공간 확보가 어려운 상황이다. 컨테이너 박스도 중요한 물적 설비다. 이게 제대로 반납이 돼야 하는데, 반납되지 않으면 지체료가 부과된다. 며칠만 지나도 금액이 커진다. 이와 관련된 분쟁이 많다. 내년에는 불경기가 예상되다 보니 건조 중인 선박을 찾아가지 않는 소송이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운임이 대폭 낮아지는 현상이 나타나면 기존 계약을 파기하려는 법률 분쟁도 나타날 것으로 보인다.

―스스로 바라보는 자신은 어떤 사람인가.

▷해운산업과 해상법의 발전을 위해 40년 이상을 매진한 사람이다. 고향 영덕의 존속과 발전에도 기여하고자 한다. 외부에는 해상법의 대중화와 국제화에 이바지한 사람, 강의뿐 아니라 연구도 잘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 특히 영어 논문을 많이 작성해 한국 해상법의 국제화를 이끈 사람, 모든 에너지를 바다 산업 육성에 바친 사람이었으면 한다.

▶▶ 김인현 교수는…

1959년생. 경북 영덕 축산항에서 수산업을 하던 집안에서 태어났다. 영해고를 졸업한 뒤 1978년 한국해양대에 진학해 1982년 졸업했다. 1993년까지 항해사와 선장으로 근무했으나 좌초 사고를 겪고 법을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에 고려대에서 석사·박사 과정을 밟았다. 김앤장법률사무소에서 해상법 전문가로 근무했다. 1999년 목포해양대 부교수, 2007년 부산대 부교수를 거쳐 2009년부터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로 근무하고 있다. 10여 권의 책과 160여 편의 논문을 펴냈다. 한국에서는 보기 드문 경험과 이론을 겸비한 해상법 전문가다.

[정희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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