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라의 티키타카(37화)[연재소설]

에린 입력 2022. 8. 12.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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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는 잠을 설쳤다. 영지가 취하긴 했어도 빈말로 들리진 않았다. 어젯밤 영지는 한남동으로 데리러 와 달라며 취기 어린 콧소리로 전화했다. 핸드폰 너머로 들리는 왁자지껄한 소음이 그곳 분위기를 예상케 했다.

강호는 전화를 끊으려다 복잡한 심경을 털어내려 차를 끌고 나갔다. 운전하는 내내 도경이 세라를 업고 뛰는 모습이 앞 유리창에 그림처럼 달라붙었다.

영지가 알려준 주소는 어느 주점 앞이었다. 강호는 흡연자들 사이에서 벽에 기대어 비스듬히 서 있는 영지를 발견하고 클랙슨을 울렸다. 영지가 비틀거리며 걸어왔다.

문이 열리는 순간 흡연 구역의 쾌쾌한 술 냄새가 차 안의 공기를 잠식했다. 영지가 강호를 부르자 술과 안주가 뒤섞인 괴상한 냄새가 났다. 강호는 창문을 열고 송풍 다이얼을 높게 돌렸다. 영지의 블라우스 단추가 열려 그 사이로 가슴골이 보였다. 강호는 얇은 담요를 뒷좌석에서 꺼내 영지의 어깨 위로 덮어주었다.

영지는 혀가 꼬인 채 계속 중얼거렸다. 차 안에 있던 생수를 마시더니 게슴츠레한 눈으로 강호를 쳐다봤다.

“야, 한강호! 네가 잘났으면 얼마나 잘났냐고.”

“이 밤에 데리러 왔더니 고작 한다는 소리가 그거야? 나 마음이 복잡하니까 건들지 마라.”

“네가 뭐가 복잡해? 고백한 나보다 더 복잡해?”

“야!”

강호는 속도를 줄였다.

“너, 세라 때문이야? 그래?”

“그게 무슨 소리야?”

영지는 아니라는 듯 손을 휘저으며 등받이를 뒤로 눕혔다.

“말해봐, 무슨 소리야?”

“예전의 세라가 아니라고. 모르겠니? 뭔가 이상하다고. 정신 차리라고 바보야!”

영지는 자세를 고쳐 앉으며 격양된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서 세라 얘기가 왜 나와?”

“개는 안 된다고. 세라는… 빨리 늙는 병에 걸렸….”

영지가 자기가 한 말에 놀란 듯 입을 틀어막았다.

“지금 뭐라고 했어?”

강호가 차선을 바꿔 갓길에 차를 세웠다.

영지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여, 여기서 내릴게. 조심해서 가.”

강호의 표정이 굳어지자 영지는 차 문을 열고 빠른 걸음으로 차에서 멀어졌다.

강호는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전방만 주시했다. 단근질하듯 이마가 화끈거렸고 꽉 깨문 입술은 벌겋게 달아올랐었다.

강호는 그물처럼 얽힌 생각을 떨쳐내고 싶었다.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영지가 없는 말을 지어낼 사람은 아니었지만 믿고 싶지 않았다. 인터넷 검색창에 빨리 늙는 병을 검색했다. 조로증이란 키워드가 상단에 표시됐다. 관련된 기사와 논문 내용을 찾는데 손가락이 떨려왔다. 성인 조로증에 관련된 기사들도 눈에 띄었다. 내용을 읽어 내려가는 강호의 눈동자가 쉴 새 없이 흔들렸다.

투병 중인 사람들의 얼굴 위로 세라가 지나갔다. 그럴 리가 없어. 강호는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핸드폰을 이불 위로 던졌다.

생각해 보면 세라가 이상한 게 한둘이 아니었다. 한신 병원으로 가자고 한 것도 그렇고 응급실에 도착한 그녀를 대하는 간호사의 태도도 이 병원을 찾은 게 한두 번이 아닌 것 같았다. 세라의 상태가 어떤지 물었지만, 빈혈 수치가 낮다는 말만 되풀이하고 간호사는 시선을 돌렸었다.

이태원에 갔을 때도 영지의 친구인 척을 하고, 집으로 가는 길에 과호흡을 하는 바람에 놀라기도 했다. 세라는 괜찮냐고 묻기도 전에 몸을 창가 쪽으로 돌려 가방에서 약통과 생수를 꺼내 마셨다. 작고 하얀 원통이었는데 겉에는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았다. 무슨 약이냐고 묻자 영양제라고만 답했다. 하지만 새벽에 영양제를 챙길 정도로 영악한 사람이 아니란 걸 강호는 알고 있었다.

오사카에서 돌아온 세라는 많이 수척해져 있었다. 살이 빠진 것과는 조금 다르게 보였다. 표정은 밝았으나 움푹 꺼진 눈 밑은 가뭄에 갈라진 논바닥처럼 야윈 몸이 가늠되었었다. 세라는 영지와 함께 있으면 어려 보여서 제 나이로 보는 경우가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었다.

강호에게 세라는 함박눈이 내리던 날 깊게 포옹하던 묵직한 여운으로 아직도 가슴 언저리에 고여있었다. 어쩌면 더 오래전부터 그랬는지도 모른다.

강호는 어머니 장례식을 떠올렸다. 자기보다 두 배나 큰 강호의 손등을 감싸 쥐고 어깨를 토닥이던 그때부터일지도 몰랐다. 온전히 세라에게 마음을 표현하지 못한 건 부메랑처럼 항상 곁에 있을 거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세라가 충무로에 있는 라이카 매장을 들어섰을 때 도경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는 건강이 어떠냐며 머뭇거렸다. 세라는 전시회 중에 병원까지 동행한 것에 대해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입 밖으로 나오질 않았다. 대신 밥을 사겠다고 했다.

세라는 진열장에 놓인 카메라를 하나씩 구경했다. 아래 적힌 가격표를 보고 흠칫 놀랐다. 도경이 배터리 덮개를 테이프로 붙이고 다니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손님, 뭐 찾으시는 게 있으신가요?”

다른 손님을 응대하던 직원이 다가왔다.

“혹시 이 카메라가 있나요. 모델 번호는 모르겠고요. 사진은 있어요. 여기.”

세라는 직원에게 핸드폰 속에 사진을 내보였다.

“이 모델요? 근데 어쩌죠? 매장에는 없는데 오래된 모델이라 구하기 힘들 텐데요.”

“방법이 없을까요?”

“글쎄요. 본사 쪽으로 알아볼 수는 있는데 본사에 있다고 하더라도 독일에서 오려면 한참 걸리고 배송비며 비용 문제도 있고 해서….”

세라는 카메라 가격에 배송비까지 잠시 고민하다가 도경에게 이보다 더 좋은 선물은 없을 것 같다고 판단했다.

“그 모델이 있는지 알아봐 주시면 안 될까요?”

본사와 확인하는 대로 전화를 주겠다던 매장직원은 며칠이 지나도 연락이 없었다. 세라는 인터넷 검색창에 직원이 알려준 모델 번호를 쳤다. 중고로 나온 것 외에는 새 제품을 찾기란 힘들었다. 구매 대행사에도 알아봤지만, 확답을 주는 곳은 없었다.

가끔 정체된 일이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풀릴 때가 있었다. 가온의 사장이 세라와 함께 일하게 된 참에 채 상무와 함께 식사 자리를 마련하고 싶다고 연락해 왔다. 세라는 채 상무와 일정을 조율하던 중 그녀가 바이어스도르프사와 회의 때문에 출장 간다는 얘길 들었다. 그곳은 독일에서 화장품 회사로 유명했고 세라가 엘라화장품에 근무할 때도 협업하기 위해 윗선에서 공을 많이 들인 업체였다. 채 상무가 거래를 성사시킨 것도 축하할 일이지만 무엇보다 그녀가 독일에 간다는 사실이 무척 반가웠다.

“카메라?”

채 상무는 물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네. 여기선 구할 수 없다고 해서요.”

세라는 가온의 사장이 오기 전에 채 상무에게 부탁할 심산이었다.

“나야 뭐 안 될 게 있나. 카메라 정보를 주게. 근데 사진에도 관심이 있었나?”

“아니요. 선물하려고요.”

“선물을? 누군지 물어봐도 되나.”

채 상무는 그런 고가의 선물을 줄 사람이 누군지 궁금했다.

“오사카에 있을 때 도움을 많이 준 사람이에요.”

“아, 그래?”

채 상무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세라를 지그시 쳐다봤다.

가온의 사장이 식당 안으로 들어왔다. 볼록한 배를 내밀며 걷는 그의 걸음걸이는 멀리서도 한눈에 알아볼 만큼 뒤뚱거렸다.

이주 후에 세라는 채 상무를 만났다. 그녀 뒤에 꼬리처럼 붙어 있는 지우가 세라에게 알은체를 했다. 채 상무는 먼저 인사하는 지우가 대견해 카메라를 전해주는 걸 잊었다. 세라는 채 상무가 지우에게 칭찬하도록 기다렸다. 한참을 지우에 대해 얘기하다가 뒤늦게 생각난 듯 채 상무는 카메라를 꺼냈다.

도경이 분신처럼 지니고 다니던, 배터리 덮개가 테이프로 붙어 있던 그 카메라였다. 세라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잘되길 바라네.”

채 상무가 지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네?”

“아줌마 카메라예요?”

지우가 끼어들었다.

“지우야, 아줌마 아니야. 누나지.”

채 상무가 무안해서 세라를 쳐다봤다.

세라는 자신이 누군가에게 아줌마라고 불리는 게 당황스러웠다. 세라에게는 비밀을 들춰낸 냉혹한 말로 들렸다. 채 상무가 세라에게 작은 상자를 더 내밀었다. 독일에서 유명한 천연 화장수인데 써보라며 권했다. 그리고 세라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세라는 지우한테 고개를 돌리며 이 순간을 벗어나려고 했다.

차라리 내 병에 대해 말하면 어떨까. 그러면 상대가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일에 마음 졸이는 일은 없겠지. 지우가 해맑은 표정으로 카메라를 요리조리 만지며 관심을 보였다.

루프탑에 있는 레스토랑은 서울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불 꺼진 빌딩 창문에도 네온사인이 얼비쳐 수많은 전구가 소리 없이 춤을 추었다. 도경이 창가 쪽 테이블에서 손을 들었다. 세라는 쇼핑백을 옆에 놓고 앉았다. 테이블 위로 떨어지는 낮은 조도가 세라를 조금은 어둡게 비췄다. 세라는 마음이 놓였다. 도경과 마주 보며 앉은 시간이 어색할까 걱정하던 차였다.

피사체를 관통하는 날카로운 그의 눈이 부담스러울 때도 있지만 조명 아래 어색한 눈빛은 수줍어 보이기까지 했다. 세라가 머뭇거리다가 선물 상자를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이거.”

“뭐예요?”

도경의 두 눈이 동그래졌다.

“예전에 도톤보리 다리에서 저 때문에 카메라를 떨어뜨렸었잖아요. 그때 배터리 덮개가 깨졌다고…….”

“아, 그거요? 원래 헐거웠던 겁니다. 마지막에 떨어지면서 두 동강 난 것뿐인데, 그걸 기억하고 있었습니까? 설마…… 이거 카메라예요?”

세라는 카메라를 살피는 그의 고무된 표정을 보고 안심했다. 언제부턴가 도경이 자신의 비밀을 알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가 렌즈를 통해 자신을 바라보는 모습이 싫지 않았고 그가 그런 모습에 조금씩 익숙해져 가길 바랐다. 그 앞에서는 안경과 모자로 얼굴에 그늘을 만들 이유가 없었다.

“병원에 갔던 일도 고맙고요.”


도경은 카메라를 들고 어쩔 줄 몰랐다. 세라를 업고 병원으로 갔을 때 내심 예견된 일이라 여겼다. 그녀의 사진을 볼 때마다 어느 한 지점을 향해 질주하듯 불안해 보였고 이제는 그녀의 상태가 어떤지 알고 싶어졌다.

“고맙다는 말은 제가 해야 해야죠. 실은 ‘당신의 안녕’ 속에 여자의 뒷모습, 세라 씨 맞아요. 미리 말하지 못한 점 사과할게요. 혹시 기분 나쁘신 겁니까?”

세라는 사진 속 여자에 대해 모른 척하고 싶었다. 강호도 세상 사람도 그녀가 누군지 아무도 몰라주길 바랐다. 커다란 피사체에 불과한 존재로 여겨줬으면 했다. 하지만 도경에게는 묻고 싶었다.

“아니요. 괜찮아요. 다만 정말 당신이 저의 안녕을 바라고 있었는지 그게 궁금했어요.”

조명 때문인지 도경의 낯이 붉게 타올랐다.

“그러면 안됩니까?”

직원이 음식을 가져왔다. 음식 사이로 두 사람의 어색한 손이 마주쳤다.

“제가 하죠.”

도경은 세라 앞으로 샐러드 접시를 옮겨 놓았다.

도경의 핸드폰이 울렸다. 세라는 괜찮다며 받으라고 손짓을 했다.

“네, 기자님.… 그건 제가 인터뷰한 내용이 아닙니다만.”

도경은 계속 듣고 있다가 잡지사 기사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그는 손가락으로 이마를 짚으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기자는 인쇄된 기사 내용에 사진 속 여자에 대한 부분이 오보가 났다며 양해를 구했다. 차회에 정정 기사를 내겠다고 약속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는 기자가 사진 속 여자에 관해 물었을 때 세라의 입장까지 고려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마음이 무거웠다. 세라는 창밖의 야경을 보며 레스토랑에 울려 퍼지는 피아노 음률을 따라 흥얼거렸다. 그는 세라에게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난처했다. 유세라와 내가 연인관계라니.


■에린은 누구?

본명은 조선희다. 2020년 단편소설 ‘해시태그, 스타북스’를 한국문예에 발표했으며, 2021년 ‘바오밥 나무’를 동 문예지에 발표했다. 현재 경희대학교 소설 아카데미와 동인회 청맥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에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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