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트렌드는 도도히 흐를 뿐이다

이근미 기자 2022. 8. 12.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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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미 작가

해마다 패션 유행이 바뀌는데

지워지지 않는 문신 안 지겹나

환각·다이어트 위해 마약 성행

청소년에게까지 퍼져 마음 아파

기억하라! 그릇된 길 좇는 건

절대 트렌드 아니라는 사실을

서평과 트렌드 칼럼을 정기적으로 기고한 지 10년 정도 된 것 같다. 일부러라도 책을 읽고 트렌드를 좇기 위한 내 나름의 고육책이다. 20대가 가장 많이 다니는 동네로 이사 오니 일상에서 트렌드를 접하는 이점도 있다. 집 밖을 나가자마자 트렌드가 시각적으로 폭격을 가하는 곳이라 저절로 자극이 되는 편이다.

가장 먼저 다가오는 것은 여자들의 의상이다. 지난해만 해도 몸에 딱 달라붙는 레깅스가 많이 보였는데, 요즘은 배꼽티에 헐렁한 통바지가 대세다. 남자들의 백팩을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다양한 종류의 백팩으로 저마다 개성을 뽐내는 남자들 가운데 아이돌로 착각될 만큼 치장한 이들도 있다. 날씨가 좀 쌀쌀해지면 비비크림으로 피부톤을 정돈하고 짙은 눈썹을 자랑하는 남자들이 등장할 것이다.

여자들은 너나없이 앙증맞은 명품 크로스백을 메고, 남자들은 완장을 두른 듯한 옷과 빨간 하트가 빛나는 고가의 수입 의류를 척척 입고 다닌다. 짝퉁 따위에 눈길도 안 준다는 요즘 트렌드에 맞춰 백화점에서는 MZ세대를 위한 명품 숍 구성에 공을 들이고 있다.

몸의 굴곡이 드러나거나 배꼽을 내놓은 차림새를 못마땅해하고 명품 구입을 우려하는 시선도 있다지만, 노출 패션과 메이커를 즐겼던 나는 기꺼이 응원하는 쪽이다.

거칠 것 없었던 시절 헤어커트를 위해 울산에서 부산 남포동까지 진출하고, 비싼 메이커 의류를 겁도 없이 사들이곤 했다. 얼마 전 초등학교 교사 출신 친구와 대화하다가 첫 월급이 20만 원이었다는 말에 기겁할 듯 놀랐다. 그 시절 내가 ‘라보떼’에서 18만 원 하는 모직 투피스와 14만 원짜리 ‘아라아라’ 점퍼를 비롯한 수많은 옷을 사들인 기억이 나서였다. ‘등골 브레이커’가 아닌 ‘내돈내산’이었다는 게 그나마 면죄부가 될까.

비싼 메이커 옷을 두르고 다니다가 어느 날 ‘투모로우 뉴스’라는 중저가 브랜드에 눈이 꽂혔다. 노란색 누비 점퍼를 다 같이 입고 병아리들처럼 몰려다니던 때가 있었다. 여름에 그 브랜드에서, 양쪽 옆구리가 훤히 드러나는 짧은 티셔츠를 내놨을 때도 친구들과 단체로 입고 거리를 활보했다. 남의 집 애들까지 간섭하던 한 세대 전 어른들은 “그기 머꼬, 다 큰 가스나들이”라며 혀를 쯧쯧 찼다.

뒤늦게 대학에 입성하여 기숙사에서 지낼 때 의상학과 친구가 “느그 아부지 뭐 하시노” 하고 물어 왔다. 둘둘 감은 메이커 옷을 보고 하는 말에 “울산 애들은 다 이러고 다녀”라고 했다. 직장 다닌 친구들과 피아노교습소를 운영했던 내가 수입의 거의 대부분을 옷에 퍼부었다는 구체 사정을 들먹이며….

로드 스튜어트 스타일의 층 많은 커트 머리를 차분한 단발로 바꾸고 청바지에 맨투맨 티셔츠로 교내 트렌드를 따라가면서 캠퍼스 생활을 마쳤다. 100원짜리 학교 자판기 커피를 마시며 ‘검소한 생활’을 다짐했건만, 첫 달 월급을 몽땅 ‘논노’ 의상 구입에 투입하면서 명동 트렌드 대열에 합류하고 말았다.

요즘 MZ세대의 의상을 보면 피식 웃음이 나온다. 유행은 돌고 돈다는 말을 그대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레깅스는 스키니진, 시가렛팬츠와 함께 1990년대 중반부터 줄기차게 사랑받은 패션이다. 거리를 쓸고 다닌 통바지의 추억은 기성세대라면 누구나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그때보다는 좁지만 꽤 넓은 바지가 새롭게 유행하고 있으니 거리가 좀 깨끗해지려나.

소확행, 워라밸 등 요즘 트렌드에 대체로 찬성이다. 하지만 썩 지지하고 싶지 않은 트렌드도 몇 가지 있다. 피 터지게 일하며 한 푼이라도 아껴서 마흔 살부터 금융소득으로 살겠다는 파이어족. 2030 때 꼭 경험해야 할 일이 많은데 청춘을 돈 모으는 데 날리고 중년 이후부터 쉬엄쉬엄 살겠다는 건 안타까운 생각이다. 2030에 쌓은 실력으로 40대부터 빛을 발하는 사람을 많이 봤기 때문이다.

좀 과장해서 한 사람 걸러 한 명꼴로 과다 문신을 한 청년들과 마주칠 때면 매년 의상 트렌드가 바뀌는데 지워지지 않는 문신이 지겹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얘기를 하고 보니 ‘유퀴즈’에서 어른과 꼰대의 차이를 말해 달라는 요청에 한 초등학생이 “어른이 되면 꼰대가 돼요”라던 말이 떠오른다.

꼰대 소리 백 번 들어도 말리고 싶은 건 요즘 은밀하게 유행한다는 마약이다. 어느 틈엔가 마약이 청소년들에게까지 퍼져 큰 문제가 되고 있다. 한 세대 전 청년 시절을 되짚어 보면 마약은 아예 침투할 여지가 없었다. SNS라는 은밀한 통로 때문에 요즘 청년들이 피해를 보는 듯해 마음 아프다. 시사 프로그램에서 살 빼려는 이들에게 마약 성분의 약을 과도하게 처방해 주는 행태를 보며 분노를 느꼈다. 자신도 자녀가 있을 텐데, 미래세대를 병들게 하고 번 돈으로 대체 뭘 하려는 걸까.

트렌드는 도도히 흘러가는 것이다. 막아 봐야 소용없다. 그렇다고 잘못된 것까지 따라갈 필요는 없다. 환각에 취하기 위해, 살을 빼기 위해 마약에 빠지는 일은 절대 트렌드가 아니라는 걸 명심했으면 한다.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책, 성서의 매력은 다시 보면 전에 못 본 문구가 툭 튀어나오는 데 있다. 어제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라는 구절이 눈을 찔렀다. 마약이 너를 원하나 너는 마약을 다스릴지니라. 기억하라! 잘못된 길을 따라가는 사람은 절대 트렌드 세터가 아니라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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