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썸&산] 왕씨 성을 버리고 목숨을 건진 고려 왕족의 섬

신준범 2022. 8. 12.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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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흥도 국사봉 산행과 장경리·십리포해수욕장 여행, 측도·목섬 '모세의 기적' 체험
자연미 살아 있는 십리포해수욕장의 낭만을 즐기는 남과 여. 바다만 알고 있는 그 남자, 그 여자의 이야기가 궁금하다.

섬 이름으로 남은 사내가 있다. 그는 고려의 마지막 왕족이었다. 익령군 왕기는 고려가 망조로 들어선 정세를 읽고 배를 타고 이 곳으로 이주했다. 왜구 약탈로 버려진 섬에 정착해 땅을 개간하고 짐승을 기르고 고기를 잡았다. 누렸던 모든 걸 버리고 외딴 섬의 목동으로 살았다.

왕씨 성을 숨긴 사내가 섬에 정착하고 3년 후 고려가 망했다. 대부분의 왕족은 거제도 앞바다에 수장되어 몰살당했으나 그는 살아남았다. 이후 익령군翼靈君의 '령靈'과 '일으킬 흥興'을 써 영흥도라 부르게 되었다. 왕씨에서 옥씨와 전씨로 성을 바꾸고 말을 키우는 목동이 되어 일가를 살린 것.

조선의 실학자 이중환의 <택리지>에도 이 기록이 남아 있다. 흥미로운 것은 조선의 어느 관원이 영흥도에서 익령군이 살았던 집의 문을 열어보려 하자 목동 남녀가 나타나 "이 문을 열면 그 자손이 죽습니다. 그런 연유로 이 문을 열지 못하게 한 지 300년이 되었습니다"라며 애걸하여 그만두었다고 한다.

영흥도 국사봉은 156m로 높이는 낮지만 숲이 짙어, 진한 숲 향기를 맡으며 걸을 수 있다.

비범한 소사나무와 거대한 전망데크

육지가 된 섬으로 갔다. 졸업을 앞둔 대학생 최동혁(연세산악회)씨와 대면 수업을 막 시작한 대학생 이재경(경기대산악부)씨가 함께다. 초면의 청춘 남녀 사이에 긴장감이 돈다. 섬과 섬 사이 여백 같은 바다가 있었다. 대부도, 선재도, 영흥도를 잇는 다리를 차례로 지나며, 간극은 메워져 웃고 떠드는 사이가 되었다.

대부도까지는 도시였는데, 선재도에 들자 섬이다. 시선을 움켜쥔 건 작은 무인도인 목섬. 쪽쪽이를 입에 문 아기마냥 귀여워, 가보고 싶은 충동이 든다. 흔히 '모세의 기적'이라 불리는 썰물에 걸어갈 수 있지만, 지금 길은 바다 아래 있다.

영흥대교를 지나 곧장 산으로 향한다. 막강한 햇살이 작열하는 영흥도, 바다가 아닌 산을 찾은 이는 우리뿐이다. 영흥초등학교에서 곧장 능선으로 치고 오른다. 아무런 이정표가 없어도 숲 향기를 따라 수풀 속으로 사라지는 남녀. 치렁치렁 쏟아지던 햇살도 100m대 산 그늘을 뚫지 못한다.

편안한 숲길을 걷는 대학산악부 이재경씨와 최동혁씨.

사람이 꽤 오지 않은 듯 수풀에 덮인 산길이 유적처럼 드러난다. 약간 당황스러웠던 산길 찾기도, 어둠에 익숙해진 시력마냥 선명해진다. 산이 낮다 하여 꽃향기도 옅지는 않다. 차량 소음을 지우더니 마음까지 차분히 가라앉히는 낮은 숲, 의외로 풍성하다. 햇살을 머금고 살랑살랑 일렁이는 초록 천장이 싱그럽다. 고즈넉한 산길을 따라가자, 온갖 자극으로 부어 있던 마음이 가라앉는다. 경계 태세의 곤두선 정신을 슬며시 어루만지는 완만한 산길.

능선에 닿자 선명한 산길과 이정표가 있다. 소나무, 소사나무, 갈참나무가 늘어서 있고, 맑은 새소리가 들리는 평범한 숲. 바다 한 줌 보이지 않아도 심심하지 않은, 기왕이면 길게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이 드는 긴장감 없는 낮은 능선이다. 부드러운 오르내림이 몸을 다독이니, 쌓인 피로가 가루가 되어 부서진다.

차가 다니지 않는 고개의 도로를 지나 국사봉 정상으로 간다. 바위 한 점 없는 푸근한 육산을 걷는 일이 완행열차로 여행하는 것만 같다. 느리게 지나가는 비슷비슷한 초록들, 식생의 균형이 충실하게 잡힌 숲의 편안함. 어렵지 않은 오르막을 쭉 올라서자, 3층짜리 데크 전망대가 있다. 거대한 로봇처럼 숲을 뚫고 솟았다.

BAC인증지점인 국사봉 정상의 안내판. 정상 일대의 쓰레기 정화 활동을 한 두 사람이 장난스런 포즈를 취했다.

전망대를 둘러싼 나무는, 그냥 나무가 아니다. 상투 틀 듯 굽이굽이 가지를 감아 올린 소사나무의 기묘한 향연. 세월을 짜내어 가지를 뻗었다. 어딘가 신비로운 구석이 있는 늙은 소사나무는 낮엔 태양과 정을 맺고, 밤엔 우주와 소통할 것만 같다. 영흥도는 예부터 바닷바람이 심해 농사를 짓는 족족 해풍을 입었다고 한다. 피해를 막고자 소나무를 비롯해 여러 종류의 나무를 심었으나 모두 죽고, 살아남은 소사나무가 번성해 지금까지 왔다.

보통 경치가 없는 육산 정상은 나무를 일부러 베어 시야를 트이게 하는 일이 많은데, 소사나무를 살리고자 만든 전망데크인 것. 계단을 올라 꼭대기에 서자 처음으로 서해바다가 눈인사를 한다. 안내판에는 '고려 왕족 익령군이 이곳에 올라 나라를 걱정하였다고 하여 국사봉國思峰이라 이름 지어졌다'는 유래가 전한다. 익령군의 섬 살이는 어땠을까. 왕족이면 행복하고, 목동이면 불행했을까. 명석하고 과감했던 그에게 이곳은 진정 자유로운 '영혼이 흥하는 섬'은 아니었을까.

국사봉 능선에서 휴식을 취하는 이재경·최동혁씨. 국사봉은 능선은 완만해 산행이 쉽다.

하산은 장경리해수욕장이다. 영흥도에서 가장 큰 해변으로 곧장 내려가 바다 구경을 할 생각에 걸음이 빨라진다. 하산 길목의 통일사는 6.25 당시 전사한 남편의 넋을 기리기 위해 비구니가 된 아내가 세운 절이다. 스님의 남편 서씨는 1951년 1.4 후퇴 당시 서부전선에서 1개 소대 병력으로 중공군 대부대와 싸우다 소대원이 모두 전사하자, 자결했다고 한다.

불법 주정차를 막기 위해 깔끔하게 정비된 도로와 주차장, 장경리해수욕장은 피서객 맞을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잔치 준비를 다 해놓고 한 숨 돌리며 쉬는 듯했다. 1km에 달하는 긴 해변은 갯벌과 뙤약볕이 지배한다. 조금만 서 있어도 땀이 송골송골 솟는 것이, 드넓은 해변이 쓸쓸한 이유는 자명하다.

시원한 콩국수로 요기를 하고, 십리포해수욕장으로 간다. 기온 30℃가 넘는 한낮, 땡볕 도로를 걸을 순 없으니 차로 이동한다. 영흥도 선착장에서 10리 떨어진 곳의 해변이라 이름이 유래하는 십리포는 600m로 아담하지만 방풍숲과 아기자기한 해변이 조화롭다. 십리포는 소사나무가 명물이다. 150년 이상 된 소사나무 노거수가 주위를 에워싸고 있다. 소사나무를 찾아 해변 끝 데크길로 접어든다.

장경리해수욕장 오른쪽 끝 해안선의 빗살무늬 해벽. 영흥도는 조수간만의 차가 심해 사람 표정마냥 해변 풍경이 급변한다
장경리해변 오른쪽 끝의 자갈지대. 해무에 싸인 자월도가 신기루처럼 떠있다.
장경리해수욕장의 낙조. 화려한 색조로 노을이 지는 '하늘 극장'의 작품이 매일 상영된다.

"골골골" 노래하는 귀여운 해변

데크길 입구부터 노거수 소사나무가 신령스런 관록을 드러낸다. 짜디짠 바람을 숱하게 삼켰을 나무의 굳은 심지가 푸른 잎사귀에 깃들어 있다. 해안가를 싸고도는 데크길 위로 소사나무가 손을 내민다. 바다와 나무를 동시에 즐기는 데크길 끝에 흰 조개 해변이 깜짝 쇼처럼 나타난다. 몰디브마냥 투명한 물과 순수한 흰 조개로 덮인 해변은 영흥도가 숨겨둔 히든카드다. 파도가 지나갈 때마다 "골골골"하고 조개해변이 귀여운 소리를 낸다. 데크 길 끝까지 온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비밀스런 선물이다.

계단을 따라 오르자, 소나무가 있는 너른 전망대다. 멀리 인천 송도와 영종도, 무의도까지 아스라이 펼쳐진다. 해무에 반쯤 몸을 숨긴 무의도는 먼 바다로 흘러가는 것만 같다. 다시 십리포로 돌아간다. 해변을 걷다가 무대처럼 보이는 딱딱한 모래 위에 멈췄다. 캠핑의자와 테이블을 꺼내 펼쳤다.

십리포해수욕장 왼쪽 끝 데크탐방로. 풍성한 소사나무 잎이 줄기를 뻗은 십리포의 필수 산책 코스다.

밀물이 들이치고 있었다. 아랑곳 하지 않고 남자와 여자가 마주보고 앉았다. 바다가 다가오고 있었다. 두 사람 말소리는 들리진 않았지만 무언가 깊은 이야기가 있을 것만 같았다. 밀물이 아닌 다른 감정도 들이칠 것만 같은 풍경. 드라마처럼 피아노 연주가 흘러나오는 것 같은 착각, '마지막 매혹Last Fascination' 선율이 은은히 밀려오는 것만 같았다.

노을이 없어도 영흥도의 저녁은 감미로웠다. 피어오르는 불빛과 바다의 원초적인 여백이 잊기 어려운 풍경을 평범히 그려냈다. 무더위에 무리해서일까 저녁을 먹고 숙소에 도착해, 다들 심해로 가라앉듯 깊은 잠에 빠졌다.

장경리해변은 도로와 인접해 있어, 드라이브 코스로도 인기 있다.
영흥도에 가면, 인천이라 믿기 어려운 바다가 있어 한 번쯤 단단한 모래 위를 뛰고 싶어진다. 십리포해변의 남과 여.

계획보다 늦잠을 잔 다음날 아침, 영흥도를 차로 굽이굽이 둘러보고 선재도로 향했다. 선재도는 영흥도와 대부도를 잇는 다리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바다가 갈라지고 길이 생기는 섬을 2개나 가지고 있었다. 측도와 목섬이다. 측도는 사람이 사는 섬이라 이채로웠다.

마침 길이 열려 있었다. 길이라기보다는 바다에 잠겼다 드러나는 자갈더미였다. 그 위를 차량이 가끔 지나고 있었다. 예상치 못한 독특한 풍경, 지난 3년간 매달 전국의 섬만 취재했지만 이런 풍경은 처음이다. 울퉁불퉁한 바닷길로 차를 몰았다. 덜그럭거리는 길로 매일 이별했다가 만나는 일상, 측도에 숙소를 잡아 며칠간 열렸다 닫히는 바다만 보고 있어도 지루하지 않겠다.

목섬으로 갔다. 신기루처럼 땅이 이어져 있었다. 너무 뜨거운 햇살 때문인지 아무도 없었다. 남자와 여자가 겁도 없이 폭염을 헤쳐 섬으로 걸어갔다. 햇살이 너무 밝아서인지 빛 속으로 사라지는 것 같았다. 밀물이 들어오고 있었다. 지금 나오지 않으면 고립될 터.

측도 해안선을 걷는 최동혁·이재경씨.
측도와 선재도를 잇는 자갈길. 하루에 두 번 열리는 바닷길, 광활한 여백이 지평선까지 펼쳐진다.

영흥도 가이드

국사봉은 경치 없는 육산이지만 숲이 좋고, 산길이 부드러워 걷는 맛이 있다. BAC 인증지점인 정상에는 3층 높이의 대형 전망데크가 있어 경치가 터진다. 산행은 다양한 코스로 연계 가능하다. 길게 걸으려면 붉은노리 삼거리(붉은노리민박)에서 능선을 타고 올라야 한다.

영흥초교 들머리는 초반이 희미하고 폐가가 있어 지저분하지만, 능선까지만 올라서면 선명한 산길을 만난다. 영흥면종합운동장 주차장에서 올라오는 산길이 가장 선명하다. 정상 직전의 안부에 도로가 있으나 차량 통행이 드물다. 정상에서 직진하면 지능선을 따라 영흥면종합운동장 부근 마을로 내려서게 된다.

정상에서 왼쪽으로 꺾어 통일사 방면 임도를 따르면 장경리해수욕장에 닿는다. 영흥초교에서 장경리해수욕장까지 5km 거리이며 2시간 정도 걸린다. 잔잔한 오르내림이 있지만 초보자도 어렵지 않은 수준이다.

교통

지하철 4호선 오이도역에서 790번(1시간 간격 운행) 버스를 타면 영흥도 버스터미널에 닿는다. 50분 정도 걸린다. 영흥도 터미널에서는 십리포를 거쳐 장경리해수욕장으로 가는 버스와 붉은노리삼거리를 거쳐 장경리해수욕장으로 가는 버스가 매일 16회 운행한다. 장경리해변까지 30분 소요. 십리포까지 10분 소요. 영흥도터미널에서 산 입구인 붉은노리삼거리까지 2km, 종합운동장까지 2.5km 거리다. 영흥도 개인택시(010-8300-1518, 010-9292-4234, 032-882-0067)

맛집

BAC 플러스 가이드 기사 참조

BAC 인증지점

국사봉 정상 안내판 N37 16.232, E126 27.794

월간산 2022년 8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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