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카페>'부모의 장수' 축원.. 자식들의 '녹봉 봉양' 모습 세세하게 담아

기자 2022. 8. 12.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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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선묘조제재경수연도 제5폭 경수연, 18세기 후반, 지본채색, 세로 32.7㎝, 가로 23.7㎝, 홍익대박물관.
1 선묘조제재경수연도 제3폭 수친계회, 지본채색, 세로 32.7㎝, 가로 24.5㎝, 홍익대박물관.
3 선묘조제재경수연도 제1폭 대문 정경, 지본채색, 세로 32.5㎝, 가로 23㎝, 홍익대박물관.
4 선묘조제재경수연도 제2폭 조찬소, 지본채색, 세로 33㎝, 가로 23㎝, 홍익대박물관.

■ 박정혜의 옛그림으로 본 사대부의 꿈 - <6> 경수연도

1605년 70세 이상 노모 모시고 있는 관료 13명이 연 잔칫날 그린 ‘선묘조제재경수연도’ 대대손손 자랑으로 여겨

계회 참석하는 아들은 벼슬 있어야… 자리 배치는 나이 순서가 아닌 아들의 품계 따라 정해져

조선시대 사가기록화 중에 부모의 장수를 축원하는 잔치의 모습을 그린 경수연도(慶壽宴圖)가 여럿 남아 있다. 그중에서 시대를 거듭하며 이모돼 현재 여러 소장처에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전하는 그림이 있는데, 바로 ‘선조대에 여러 재상이 베푼 경사스러운 수연 그림’이라는 제목의 ‘선묘조제재경수연도(宣廟朝諸宰慶壽宴圖)’다. 오늘날 경수연도를 대표하는 그림으로서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1605년 당시 70세가 넘은 노모를 모시고 있는 관료 13명이 연합해서 개최한 합동 수연을 기념한 그림으로 행사의 주요 장면을 5폭에 나누어 담았다. 이 행사를 처음 제안한 사람은 74세의 모친을 모시고 있던 이조참판 한준겸(韓浚謙, 1557~1627)이었다. 그런데 한준겸이 이 대규모의 수연을 제안할 수 있었던 계기는 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602년 가을 당시 예조참의 벼슬을 하던 이거(李거, 1532~1608)가 99세 된 모친 채부인(蔡夫人, 1504~?)을 봉양하고 있다는 소식이 조정에 알려졌다. 이 사실을 안 선조는 채부인이 100세가 되는 이듬해 정초에 식량과 음식을 보내는 은혜를 베풀었다. 또 아들 이거의 품계를 가선대부로 올려 형조참판에 임명했을 뿐만 아니라 이거의 부친부터 증조부까지 3대를 대부로 추증해 채부인을 기쁘게 했다. 물론 이에 걸맞게 이거의 모친도 정부인에 봉해졌다. 이거는 모친의 생신날 수십 명의 이름난 고관을 초대해 성대한 잔치를 베풀었는데, 한준겸은 바로 이 잔치에 참석했던 한 명이었다.

합동 수연을 열자는 한준겸의 제안에 뜻을 같이한 계원은 이거·이원(李, 1543~?) 형제 외에도 진흥군 강신(姜紳, 1543~1615) 삼형제, 금계군 박동량(朴東亮, 1569~1635), 공조판서 윤돈(尹暾, 1551~1612), 형조참판 남이신(南以信, 1562~1608), 동지중추부사 홍이상(洪履祥, 1549~1615), 여흥군 민중남(閔中男, 1540~1605), 병조참지 윤수민(尹壽民, 1555~1619), 장악원 첨정 권형(權형, 1541~1605) 등이었다. 이들은 행사에 앞서 ‘노모에게 헌수한다’는 수친계(壽親契)를 결성했다. 계원은 13명이지만 이들 중에 형제가 포함돼 있었으므로 참석한 대부인은 모두 10명이었다. 계원들은 진행에 필요한 규칙을 정하고 힘을 합해 술과 음식을 조금씩 준비하기로 했다. 주목할 만한 것은 행사의 명칭을 ‘경수연’으로 공식화하는 데에 합의한 것인데, 이후 ‘경수연’은 ‘수연’을 대신한 이름으로 널리 사용됐다.

‘선묘조제재경수연도’에는 이 수친계원들의 모임을 그린 장면도 포함돼 있다(그림 1). 계원의 아들들이 아버지를 모시고 참석했는데, 계회에 참석하는 아들은 벼슬이 있어야 한다는 조건이 따랐으므로 두세 명의 아들을 대동한 계원이 있는가 하면 아들이 많아도 혼자 참석할 수밖에 없는 계원도 있었다. 경수연의 장소를 제공한 사람도 한양 남부 장흥동(지금의 중구 회현동)에 저택을 소유하고 있던 한준겸이었다. 계원 중에서 가장 크고 넓은 집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날짜는 노모들이 거동하기 편하게 화창하고 따뜻한 음력 4월로 잡았다. 대부인들이 모인 연석을 살펴보면, 덧마루를 깔아 공간을 넓힌 내당(內堂)에 대부인들이 둘러앉고, 그들을 보좌해 며느리 대표가 대부인의 뒷줄에 앉았음을 알 수 있다(그림 2). 102세로 가장 노령이던 이거의 모친 채부인과 정경부인으로서 가장 나이가 많았던 진흥군 강신의 모친 윤부인(83세)이 가장 상석에 자리 잡았다. 계의 결성을 전제로 한 관료들의 합동 경수연이었으므로 대부인들의 자리 배치는 나이 순서가 아니라 아들의 품계에 따라 정해진 것이다. 자리 배치가 엄격했음은 채부인의 며느리가 앉은 방향과 윤부인의 며느리가 앉은 방향이 서로 다른 것에서도 드러난다. 윤부인의 며느리는 정경부인으로서 시어머니와 같은 방향으로 앉았지만, 채부인의 며느리는 정부인이었기 때문에 다른 며느리들과 같은 방향으로 자리해 품계의 차이를 표시했다.

계원들이 정한 행사 규칙에 따르면, 당일 계원들은 오전 7시에서 9시 사이에 어머니를 모시고 행사장에 왔고 행사의 실무를 맡은 계원의 자제들은 더 일찍 새벽에 모였다. 대부인들은 자리에 앉은 채로 상견례를 했으며 며느리들은 대부인들이 좌정한 후 차례로 절을 하는 것으로 예를 갖췄다. 계원과 그들의 자제들은 먼저 축하의 말씀과 축수의 술잔을 올린 다음에 두 명씩 짝을 이뤄 춤을 췄다.

화면에는 그러한 내용이 잘 담겨 있다. 계원 한 명이 절을 하고 있으며 각 집에서 차출된 시비(侍婢)는 계원이 올린 술잔을 대부인에게 전하고 있다. 미리 정한 경수연의 규칙대로 헌수를 마친 자손 두 명은 춤을 추고 있다. 큰 차일 아래 휘장과 병풍으로 공간을 위호하거나 구획했다. 예컨대 가야금을 연주하는 기녀 두 명과는 별도로 남자 악공들은 분리된 공간 안에서 남자 손님들을 위해 곡을 연주하고 있다. 이날 노래와 음악의 사용은 선조의 특별한 허락으로 가능했다. 전란을 겪은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에 잔치에서 풍악을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사회 분위기가 아니었다. 다만 국상을 당한 때임에도 사대부가 노부모를 위해 베푼 수연에서 왕이 특별히 풍악을 허락한 사례가 있었으므로 선조도 효도의 정치로 교화한다는 의미에서 음악 사용을 허락한 것이다.

‘선묘조제재경수연도’에는 수친계회와 경수연 장면 외에 성대한 잔칫날의 분위기를 시사하는 장면이 있다. 친지와 손님들이 타고 온 말과 가마, 하인들로 붐비는 한준겸 저택의 대문과 중문 주변의 정경을 부감시로 담은 것이다(그림 3). 홍이상은 “이날 집 앞에 모인 초거(초車)가 9량, 유옥교(有屋轎)가 20량이었으며 이를 따라온 시종은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고 증언했는데, 화면에서 그러한 정황을 느낄 수 있다. 또 다른 장면은 야외에 설치된 임시 부엌에서 음식을 조리하고 붉은 원반에 상을 차리는 모습이다(그림 4). 오른쪽 차일 안에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손님들이 둘러앉아 상을 받았고 두 명의 시종이 시중을 들고 있다. 현장의 지휘를 맡은 자제들은 음식상을 나르는 일꾼들의 발걸음을 재촉하고 남자 조리사인 숙수(熟手)들은 대형 가마솥을 여러 개 걸고 많은 양의 음식을 능숙하게 만들고 있다. 선조는 각 도의 관찰사에게 경수연에 필요한 물자를 구해서 보내라고 명했다. 이 두 장면은 행사의 중요 절차는 아니지만, 왕의 배려와 은택으로 치러진 경수연의 풍성함을 간접적으로 전달한다.

이처럼 ‘선묘조제재경수연도’에는 자식 된 입장에서 ‘효자는 날을 아낀다’는 애일(愛日)의 간절함과 이왕이면 ‘녹봉으로 봉양하는 영화’를 누리게 해드리려는 심정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더구나 왕이 내린 은혜를 즐겼으니 이 사실을 그림으로 남겨 대대손손 자랑으로 삼을 만했음이 분명하다.

미술사학자·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 의령남씨가전화첩

‘선묘조제재경수연도’의 소장본이 여럿 전해진 것은 의령남씨 집안에서 조상의 행적이 담긴 기록화를 모아 가전화첩을 만들 때 이 그림을 포함한 덕분이다.

‘의령남씨가전화첩’은 영의정을 지낸 남재(南在, 1351~1419)를 파조로 하는 의령남씨 충경공파 후손들이 주축이 돼 집안의 행사기록화를 모아 만든 것이다. 남재가 미리 준비한 자신의 묘역을 태조의 수릉지로 양보한 고사를 시각화한 ‘태조망우령가행도(太祖忘憂嶺駕幸圖)’를 시작으로 문무관의 말타기와 글짓기시험에 1등을 거머쥔 11세손 남응운(1509~1587) 일화를 그린 ‘명묘조서총대시예도(明廟朝瑞蔥臺試藝圖)’, 70세 된 모친을 모시고 남이신(13세손)이 참가한 경수연을 그린 ‘선묘조제재경수연도’, 경복궁 옛터에서 치러진 진작례에 참가한 18세손 남태회(1706~1770) 행적이 담긴 ‘영묘조구궐진작도(英廟朝舊闕進爵圖)’ 등으로 구성됐다.

가전화첩은 오랜 시간 축적된 자료가 바탕이기에 주로 18세기 후반에서야 완성될 수 있었다. 19세기 말에 모사된 국립고궁박물관 소장본에는 ‘경이물훼(敬而勿毁)’라는 표제가 붙어 있다. 공경하게 받들되 손상시켜서는 안 된다는 의미로, 가전화첩의 가치와 의미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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