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리뷰>우리가 '일'이라 믿고있는 '시간 때우기'의 민낯

나윤석 기자 입력 2022. 8. 12. 09:00 수정 2022. 8. 12.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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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 인류학자와 철학자가 쓴 ‘가짜 노동’은 보여주기식 회의와 형식적 보고 등 무의미한 노동을 반복하는 현대 직장생활의 어두운 이면을 포착한다. 게티이미지뱅크

■ 가짜 노동

데니스 뇌르마르크·아네르스 포그 옌센 지음│이수영 옮김│자음과모음

형식적 보고·보여주기식 회의

현대인 노동시간 줄지 않는건

‘가짜 노동’ 시간이 많기 때문

‘번아웃’도 가짜 노동이 초래

‘진짜 노동’과 섞이면서 탈진

주 4일제 기업 성공사례 통해

‘일’의 본질적 의미 깊이 성찰

“우리 모두는 일터에서 ‘얼뜨기’라는 걸 들키지 않으려 허세를 부린다. 사무실은 매분 매시간 실없는 일을 합리화하려 애쓰는 이들의 부조리한 노력으로 가득하다.”

대기업 사무실 풍경을 풍자한 만화 ‘딜버트’로 유명한 스콧 애덤스는 자신의 작품에 대해 이런 코멘트를 남겼다. 모두 정신없이 바쁜 척하지만 실은 얼뜨기처럼 의미 없는 일로 시간을 때우는 게 화이트칼라 노동자의 일상이라는 것이다. 덴마크 철학자와 인류학자가 함께 쓴 ‘가짜 노동’은 바로 이 얘기를 한다. 저자들은 폭넓은 현장 취재와 조사를 통해 현대인들의 근로시간이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 것은 일이 넘쳐서가 아니라 쓸데없는 가짜 노동이 너무 많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여기서 말하는 가짜 노동이란, 관료제 피라미드를 타고 올라가는 형식적 보고와 보여주기를 위한 회의, 누구도 읽지 않지만 관례상 만드는 연례 보고서 작성 등을 포함한다. 이 독특하고 새로운 연구서는 직장생활에 깃든 부조리한 광경을 묘사하며 가짜 노동만 없애도 근로시간은 줄고 생산성은 올라갈 뿐 아니라 일을 통해 행복과 보람을 얻는 삶을 구현할 수 있다고 말한다.

‘바빠 보이는 것’이 핵심인 가짜 노동의 시작은 산업화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현대 경영학의 창시자로 불리는 프레더릭 윈즐로 테일러는 19세기 말 생산공정의 효율을 위해 ‘스톱워치’를 도입했다. 스톱워치와 함께 출현한 것은 ‘관리직’이라는 새로운 직종이었다. 현장 관리자들이 초시계를 들고 근로자의 업무를 감시하면서 노동은 그야말로 초 단위까지 분해됐다. 처음엔 공장 노동자만이 스톱워치 감시 대상이었으나 얼마 안 가 사무직까지 확대 적용됐다. ‘성실한 노동은 소명이자 명예의 징표’라는 청교도 윤리에 바탕 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근로자들은 ‘가짜 노동’을 하며 책상에서 점심을 해결하고, 일이 끝나도 정해진 퇴근 시간까지 자리에 눌러앉는 일상을 이어갔다.

뒤이어 도래한 지식·정보화 사회가 인사, 홍보, 마케팅, 프로젝트 관리 등 수많은 ‘틈새 일자리’를 고안한 것 역시 가짜 노동의 증가를 불렀다. 업무량 증가 규모에 비해 너무 많은 일자리가 양산되면서 “할 일이 잔뜩 있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대부분이 빈둥거리는” 일터가 만들어진 것이다. 초기 자본주의가 스톱워치로 노동자를 감시했다면, 지식 사회는 매뉴얼로 근무 환경을 규격화한다. 효율을 위해 도입된 매뉴얼이지만 현장에선 형식적 절차에 에너지를 낭비하느라 정작 중요한 일을 놓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일례로 덴마크 병원의 한 의사는 환자를 진료할 때 매뉴얼에 포함된 140여 개의 사전질문을 던진다고 한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모두 기록하고 나면 실제로 주어지는 진료 시간은 5분이 채 안 된다.

과로로 인한 ‘번아웃’을 호소하는 근로자가 나날이 급증하는 현실을 고려하면 이런 진단이 다소 과장된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저자들은 번아웃 또한 가짜 노동이 초래한 결과라고 해석한다. 가짜 노동 역시 노동의 일부이기에 보여주기를 위한 ‘허튼짓’이 진짜 노동과 섞이며 사람을 탈진에 빠뜨린다는 것이다. 실제로 유럽 노동자 1만여 명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 따르면 응답자의 33%는 극단적 지루함에 따른 ‘보어아웃(bore out) 증후군’이 번아웃으로 이어졌다고 토로했다. “스트레스는 할 일이 너무 많은 탓에 발생할 수도 있지만, 심한 지루함과 보람의 결핍, 무의미한 타성으로도 유발된다.”

그렇다면 이런 가짜 노동을 없애면 어떤 효과가 발생할까. 책은 집중도 높은 주4일제 근무로 생산성을 끌어올린 기업 사례를 소개한다. 시간이 곧 생산성인 산업화 시대로부터 멀찍이 떨어진 지금은 직장에 오래 붙어 있다고 성과가 담보되는 세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현대 직장생활의 우스꽝스럽고도 어두운 이면을 실증적으로 들여다본 저자들은 ‘일’의 본질적 의미에 대한 성찰로 나아간다. 독일 철학자 헤겔이 말했듯 일이란 ‘한 인간이 세상에 들어가 자기 자신이 되는 방식’이다. 노동은 인간의 본성이므로 노동하지 않는 것은 인간성을 실현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시간과 에너지의 낭비’이자 ‘존재론적 낭비’인 가짜 노동이 끼어들면 인간은 일터에서 자긍심과 보람이 아닌 수치심과 소외감을 느끼게 된다.

이에 저자들이 제안하는 해법은 명쾌하다. 진짜 노동이 끝났으면 눈치 보지 말고 퇴근하자는 것이다. 사랑하는 가족, 친구와 시간을 보내고 짬을 내 자기계발에 힘을 쏟자는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그것이 본인에게도, 회사에도 좋은 일이라면서. 그렇게만 된다면, 영국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일찍이 예견한 ‘주 15시간 노동’ 시대도 결코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면서. 416쪽, 1만6800원.

나윤석 기자 nagija@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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