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후 3년 만에 찾은 한국.. 그리고 첫 코로나 양성

칼럼니스트 이은 2022. 8. 12. 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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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영부영 육아인류학] 잠시의 방심도 무서운 코로나

3년하고 2개월만에 한국을 방문했다. 코로나 때문에 가까운 곳 외출도 잘 하지 못하고 미국 소도시에서도 한참을 몸을 사리며 지냈던 터라 오랜만의 국제선 탑승은 큰 용기가 필요했다. 비행기 안에서도 공항에서도 식사를 하거나 물을 마실 때를 제외하고는 마스크를 벗지 않았고 그마저도 서둘러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급하게 마스크를 다시 쓰곤 했다.

다행히 입국한 후 권고되는 PCR 검사에서 네 식구가 모두 음성 판정을 받았고 그립던 한국 가족들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오랜만에 한국에 오니 우선 습도 높은 날씨에 조금 힘들었고 미국 시골에 적응해버린 느린 속도 탓에 한국의 빠른 속도 따라가기가 조금은 버거웠다. 그래도 보고 싶던 사람들 또 가고 싶던 곳 먹고 싶은 음식이 있는 곳이니 기분이 끝없이 좋았다. 다만 계속해서 걱정이 되는 것은 서울은 어디에 가나 사람이 너무 많다는 것이었다. 나도 그 많은 인파 중에 한 명이니 인파 자체에 대해 불평할 권리는 없지만 서울의 인구 밀도와 지가가 너무 높다 보니 미국 시골에 비해서 상점들도 식당들도 너무 작은데다 함께 이용하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너무 많다 보니 아무래도 조심스러웠다. 그래서 처음에는 식당에 가기도 조금 조심스러웠다. 식탁과 식탁의 간격이 미국 시골 식당보다 너무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너무 오랜만에 한국에 오다 보니 그립던 친구들도 만나야 하고 그러다 보니 별 수 없이 식당이나 카페를 예상보다 더 자주 이용하게 되었다.

그 때문이었을까. 3년 가까이 코로나를 겪어보지 못한 나도 결국은 코로나에 걸리고 말았다. 평소 여름마다 냉방병을 겪곤 하던 친한 친구가 나를 만나기 전날부터 살짝 몸이 으슬거렸단다. 혹시나 하고 나를 만나기 전에 코로나 자가 키트를 해보았는데 음성이 나오길래 그냥 또 냉방병이구나하고 나를 만나러 왔다. 그렇게 나를 만나고다음날 일어났는데 목이 갑자기 아파서 놀랐다고 했다. 인후통이 심상치 않아 자가 키트를 2번했는데도 음성이 나왔고 저녁까지 증상이 나아지지 않기에 혹시나 불안한 마음에 결국 병원에 갔는데 코로나 양성이 나왔다고 했다. 놀란 친구는 내게 바로 전화를 해줬고 나는 바로 자가 격리에 들어갔다. 나는 그 친구와 만난 시간이 길지 않고 그나마도 커피를 한모금 씩 마실 때 말고는 계속 마스크를 쓰고 있었기 때문에 반신반의했다.

그래도 죄송스럽지만 아이들은 우리가 묵고 있던 작은 숙소보다 더 넓고 욕실도 2개 있는 친정에서 맡아주기로 했다. 그 사이 가족들에게 문제가 옮기지는 않았을까 걱정이 되었다. 아침에 친구에게 전화를 받은 직 후 자가 키트를 해보았지만 음성이 나왔고 다음날 저녁까지도 자가 키트는 계속 음성이었다. 하지만 그 다음날 아침이 되자 조금씩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점심 때 쯤이 되자 몸이 으슬으슬 추워졌고 그 때 자가 키트를 다시 해보자 양성이 나왔다.

코로나 바이러스에 노출된 것으로 추정된지 만 이틀이 지나서야 자가키트에 양성이 뜨기 시작했다. ⓒ이은

친정에 전화해서 상황을 알리고 남편에게 부탁해서 비상약을 숙소방 앞에 걸어두게 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보건소에 가서 PCR 검사를 받았고 그 이튿날 역시나 확진 판정을 받았다. 3년만에 찾은 한국에서 첫 코로나에 걸리다니 순간 정신이 없었다. 다행히 아이들은 증상이 없었다고 했고 친정 부모님들도 그날 잠시 야외에서 마스크를 쓴 상태로 봬서 그랬는지 아무 증상이 없다고 하셨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온가족이 조심하기로 했다. 일주일이 좀 넘게 숙소방에 갇혀있으려니 타고난 집순이인 나조차도 답답했다.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으니 아이들도 계속 걱정됐다. 초조한 마음으로 친정 부모님과 아이들 상황을 전화로 확인하곤 했는데 다행히 아무도 증상이 없이 음성으로 무사히 지나갔다.

반면에 남편은 결국 내가 확진이 된 다음날부터 증상을 보여서 나의 완전 격리에 동참하게 되었다. 처음 며칠은 증상으로 둘 다 한참 고생을 했지만 그 다음부터는 많이 나아져서 책 읽고 영화 보며 하루 종일 늘어져있는 본의 아닌 호캉스를 즐기게 되었다. 사흘이 지나자 가벼운 기침과 두통, 그리고 현기증 이외에는 증상이 사라졌다. 하지만 삼주 가까이 지난 지금도 계단을 오를 때 숨이 가쁘고 가끔 기침을 하면 흉통을 느끼기도 한다.

코로나는 정말 두 번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경험이었다. 무엇보다도 법정 격리 기간이 끝난 일주일 후에도 나는 고위험군인 친정 부모님을 마음대로 뵐 수 없었다. 혹시나 싶어 먼발치에서 창문을 사이에 두고 부모님을 뵈자니 이 먼곳까지 와서 뭐하는 짓인가 싶기도 했다. 더 조심하지 않은 내 잘못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코로나 잘못이다. 아직도 팬데믹은 끝나려면 한참 멀었다. 한국에 와보니 더 실감이 나는 나날이다.

*칼럼니스트 이은은 한국과 미국에서 인류학을 공부했다. 미국에서 인류학 박사학위를 마치고 현재는 미국의 한 대학에서 인류학을 가르치고 있다. 두 아이를 키우며 아이들과 함께 성장해가는 낙천적인 엄마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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