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호소도 품어주는 어느 인권위 조사관 이야기

임지영 기자 2022. 8. 12. 0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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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출범한 국가인권위의 자칭 시조새 최은숙 조사관(사진)이 〈어떤 호소의 말들〉을 펴냈다. 세상을 바꾼 '이상한 진정'부터 국가인권위 성공과 실패의 기록 등을 담았다.
ⓒ김흥구

어떤 일은 참치 통조림과 커피믹스에서 시작된다. 국가인권위원회 조사관의 일이 그렇다. 치료감호소에서 커피믹스를 제공하지 않는 게 차별이라 주장하는 사람도 있고, 참치 통조림 두 개를 훔쳤다는 혐의로 1년 넘게 옥살이를 하는 사람도 있다. 20년 차 조사관 최은숙씨는 보통 1년에 100~200건의 사건을 종결 처리한다. 어떤 사건은 대대적으로 보도되지만 통조림류의 이야기는 대체로 캐비닛 아래 묻힌다. 조사관으로 만난 사람들의 목소리에 작은 스피커를 연결하고 싶었다는 그가 다양한 무늬의 사연을 책에 담았다. 〈어떤 호소의 말들〉이다.

서울 중구 저동1가에 있는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에서 최은숙 조사관을 만났다. 차별시정국 장애차별조사과에서 일하는 그가 건네준 명함에서 점자가 만져졌다. 20대, 대학을 졸업하고 아르바이트 삼아 학습지 교사 일을 하다 27세에 YMCA를 소개받았다. 월급 40만원을 받으며 의료사고로 자식을 잃은 부부, 리어카를 빼앗긴 노점상 등을 만났다. “1990년대 말~2000년대 초에는 시민단체가 일하기 좋은 환경이었다. 주목도 받고 일도 재미나게 했다. 2001년 인권위 설립준비단이 만들어지면서 자리를 옮겼다. 그렇게 삶이 바뀌었다.”

바뀌지 않은 것도 있다. 억울함을 호소하는 ‘진정인’을 만나는 일이다. 인권위 진정 접수 메일 주소의 아이디도 호소(hoso)다. 시민단체에 있을 때부터 ‘부당하고 억울한 일을 해결하는 데서 오는 만족감’이 있었다. 인권조사관으로 일한 지 20년이 지난 지금도 그렇다. “인권위는 문턱이 낮고 빠르게 억울함을 해결하는 데 존재 이유가 있는데 밀린 사건이 많아서 시간이 오래 걸린다. 인권침해조사과에 있을 땐 100건, 지금은 50건씩 갖고 있다. 새 진정서를 받으면 부담이 되면서도 처음 열 때 무척 궁금하다. 사소한 건 사소한 대로, 심각한 건 그것대로 해결이 안 돼 여기까지 왔을 테니 그 과정이 궁금하다.”

‘검사 구속’ 끌어낸 인권위 조사

인권위는 국가인권위원회법에서 정한 인권의 보호와 향상을 위한 업무를 수행하는 국가기관이다. 일의 범주가 넓다 보니 다양한 진정인을 만난다. 때로는 ‘악성 진정인’으로 분류될 법한 사람들의 무례를 견디는 일도 업무에 포함된다. 고된 일이지만 고성과 무논리의 언변 속에서도 진정인들이 하려는 말의 핵심이 들릴 때가 있다. “관공서와 소통하려면 육하원칙에 따라 생각을 정리해서 말해야 하는데 그게 잘 안 되는 분들이 있다. 그러니 화를 내고 소리를 지른다. 그런데 말을 자세히 들으면 사건의 부조리함이 보일 때가 있다. 조사관의 감수성이랄까. 경험이 쌓이면 포착된다. 100건 중 한 건이 그런데, 그걸로 세상이 바뀌는 건 확실하다.”

‘이상한 진정’이 세상을 바꾼다니 어떤 의미일까? “교도소에서 이상한 진정이 정말 많이 온다. 이게 말이 되나? 하는데 어느 순간 말이 돼 있는 식이다.” 소속 과에 여성 조사관이 한 명이던 인권위 출범 초창기, 범죄인에게 수갑을 채워 기둥에 묶어두는 게 예삿일이었다. 더러 고문도 자행되던 시절이다. 교도소에서 억울하다는 진정이 들어왔다. 절도범이라고 해서 이런 식으로 수치심을 주는 게 맞나? ‘커피믹스’도 마찬가지다. 치료감호소는 카페인과 뜨거운 물 때문에 커피믹스를 주지 않는다고 하지만 결국 관행이다. “엄청난 차별을 당하는 건 아니지만 진정인이 좋고 행복하다고 하면 커피믹스를 주라는 권고도 한다. 행복추구권을 찾아내는데 무슨 소동극을 보는 것 같다. 이런 작은 진정들이 (인권 감수성을) 확장시킨다. 그런 걸 찾는 즐거움이 있다.”

때로는 떠들썩하게 세상을 바꾸기도 한다. 김대중 정부 시절이던 2001년 인권단체들의 노력으로 인권위가 출범했다. 이듬해 서울지방검찰청에서 조사를 받던 피의자가 고문으로 사망했다. 관련자들은 고문 사실을 부인했고 검찰 심장부에서 벌어진 사건이 관례대로 ‘셀프 수사’를 통해 마무리되어 갔다. 인권위는 당시 서울지검에 대한 직권조사를 결정했다. 무소불위의 권력기관인 검찰을 상대로 초보 조사관 네 명이 현장검증을 했다. 그중 최 조사관도 있었다. 고문 장소인 서울지검 특별조사실 1146호는 청소를 마친 상태였다. 딱 봐도 더 나올 게 없을 것 같았다. 조사관 중 누군가가 침대 매트리스 깊숙한 곳에서 구타 도구로 보이는 경찰봉을 찾기 전까지는. 검사가 수사상의 잘못으로 구속된 첫 사례였다. 법무부 장관과 검찰총장도 옷을 벗었다.

“현장을 정말 깨끗하게 청소해놨더라. 형광등 위가 지금도 생각난다. 반짝반짝 빛이 났다. 매트리스를 들췄는데 도구가 나와서 우리도, 당사자들도 너무 당황했다. 지금 다시 하라고 하면 그 방에서 조사받은 분들의 기록을 모두 찾아봤을 것 같다. 특수부가 조사했던 사건을 토대로 교도소에서 출소한 사람들까지 다 추적했을 것이다. 그때는 너무 초보이고, 그거 하나만도 대단하다고 생각해서 못했다.” 담당 검사는 1년6개월 징역형을 받고 몇 년 뒤 특별 복권되었다. 이후 변호사로 활동하며 당시의 기억을 책으로도 냈다. 최 조사관의 이번 책에는 사건 당시 만났던 피해자의 아이가 등장한다. 파주 용주골 유흥업소에 딸린 방, 할머니 옆에서 그림을 그리던 아이는 지금쯤 20대가 되었을 거다.

책은 인권위의 성공기만 다루지 않는다. 대체로 실패기다. 대표적으로 약촌오거리 재심 사건이 있다. 2000년 지적장애가 있는 열다섯 살 소년이 경찰의 가혹 행위로 살인 누명을 쓰고 10년을 복역한 사건이다. 사건 3년 뒤 진범이 나왔는데도 담당 검사는 ‘혐의 없음’으로 불기소 처분했다. 당시 인권위에도 진정이 들어왔는데 조사 절차 문제 등 여러 우연이 겹쳐 사건이 각하됐다. 최 조사관도 잊고 있던 사건이다. 나중에 설마 하고 찾아보니 맞았다. “내 사건은 아니지만 오랫동안 마음에 담고 있었던 이야기다. 내부 이야기라 걱정도 됐지만 쓰고 싶었다. 커피믹스를 가지고도 오래 다루는데 국가가 잘못했던 사건에는 훨씬 에너지를 많이 쓰는 게 당연하다. 경찰관이나 (기업) 인사과장에게 권고하는 건 부담 없이 하면서 국가가 잘못한 걸 말하는 데 주저하면 안 된다.”

오래 담당했던 스포츠 분야 인권침해 사건에 대한 소회도 등장한다. 고문·자살·성폭력 등 힘든 사건을 여럿 다뤘지만 이 분야가 가장 힘들었다. 폭력의 관행이 지금까지 내려오는 몇 안 되는 분야다. 최근까지도 방송에 나오는 왕년의 스포츠 선수들이 선수 시절 맞은 이야기를 웃으며 할 정도로 폭력에 대한 감수성이 없다. “폭력보다 더 심각한 건 훈련량 때문에 아동학대에 가까울 정도로 아이들 몸이 망가진다는 점이다. 스포츠는 돈과 욕망이 얽혀 있어서 개선하기가 어렵다. 교육과 비슷하다. 비정규직 문제나 이주노동자 문제도 심각하지만 스포츠 분야 인권침해는 버젓이 학교에서 이뤄진다는 점에서 어렵고 힘들었다.”

인권위는 법원처럼 유무죄를 밝히지 않는다. 법적 강제력 대신 권고의 권한을 가진다. 인권을 다루는 데에 적합한 방식이기 때문이다. 최 조사관은 느림과 비효율이 인권의 가치를 실현하는 데 불가피한 시간과 비용이라고 설명한다. 현장에서 무력함을 느낄 때는 없을까? 그는 “가진 권한이 작아서가 아니라 효과적으로 쓰지 못하는 데 대한 답답함이 있다”라고 말했다. 인력은 제한돼 있고 밀려드는 일을 처리하기에 급급할 수밖에 없다. “인권위는 20년 전과 세팅이 같은데 사회는 바뀌었고 민원 넣을 기관도 많아졌다. 잘 따져가며 인력을 활용하지 못해 효율성이 떨어진다. 권고를 권위 있게 했을 때 호응이 있다. 권위는 저절로 오지 않고 숙련이 필요하다. 그 박자가 잘 맞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 안타깝다.”

입법·사법·행정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국가기구이지만 인권위도 정권에 따라 부침이 있었다. 반인권적 발언을 서슴지 않던 현병철 위원장 재임 당시에는 조사관들이 징계를 당했다. 위기가 닥치자 내부 결속이 잘 되었다. 꼬투리를 잡을까 봐 보고서를 더 치밀하게 쓰려고 노력했다. 기대가 컸던 지난 정부에 대한 실망이 오히려 컸다. 5년간 겪은 낭패감과 상실감에 대해 설명할 때 최 조사관의 목소리가 단호했다. 문재인 정부 초기, 인권위의 권고 수용률을 평가지표로 쓰겠다는 발표가 있었다. 그 말도 수사(레토릭)처럼 들렸다. ‘인권 정부’라는 상품을 홍보하는 느낌이었다. 권고가 권고인 데에는 이유가 있다.

인권위는 공무원 시험을 봐서 들어온 직원과 최 조사관처럼 시민운동이나 민간 경력으로 들어온 직원이 섞여 있다. 공무원보다는 인권위 직원이라는 정체성을 가진 이들이 많고 ‘인권을 팔아 밥벌이하기’ 때문에 직장문화가 상대적으로 좋다. 스스로 인권위의 시조새라고 명명한 최 조사관은 “10년 뒤 우리 세대는 완전히 나가고 다른 세대가 위원회의 주인이 될 거다. 인권기구에 대한 인식을 공유하고 기록으로 남기고 싶어 책을 쓴 부분도 있다”라고 말했다.

서울 중구의 국가인권위 앞에서는 다양한 진정인들이 ‘호소의 말들’을 풀어놓는다.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

“인권위에 대해 이해했다는 반응 많아”

조사관 수는 한정돼 있고 사건은 점점 복잡해지고 있다. 지난 20여 년, 세상이 좋은 방향으로 나아간 것 같지만 무력감도 커졌다. 인권이 평등의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최악의 상황에서 인권침해를 예방하는 데 효과적이고 절대빈곤 해결에도 영향력을 행사하지만 20년 동안 극단적인 빈부격차가 생겼다. 우리의 수단이 무용지물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고문을 받지 않고 명시적 차별을 받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다음 단계로서 국가기구의 역할을 못하고 외면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최은숙 조사관은 인터뷰 내내 펜을 쥐고 있었다. 조사 업무를 볼 때도 늘 지니고 있어서 익숙하다. 말하는 동안에는 눈시울이 몇 차례 붉어졌다. ‘수취인 사망’이란 단어만 듣고도 그랬다. 음주운전으로 면허가 취소돼 생계가 막막해진 고물상 진정인이 자살한 대목이 떠올라서다. 책을 쓰면서도 많이 울었다. 20여 년 묻어둔 감정이 한꺼번에 올라왔다. 그럼에도 계속 해보겠다고 그는 말한다. 일하면서 알게 된 내용을 상품화하는 과정이 부담스러웠지만 막상 책이 출간되니 인권위, 인권조사관에 대해 이해하게 됐다는 반응이 많았다. 어떤 독자는 ‘만나면 꼭 안아드리겠다’고 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장애차별조사과로 돌아가는 그의 얼굴이 다시 밝았다. 진정서 더미와 진정인들을 ‘안으러’ 가는 길이었다.

임지영 기자 tot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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