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회 영농·생활수기 당선작-일반부문] 삶은 흙으로 된 캔버스 위에

2022. 8. 12. 0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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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회 영농·생활수기 일반부문 당선작 - 조일선(44·경남 함양군 함양읍)
40줄 넘어 찾아온 강박장애
명상·마음 수련 되레 독으로
신랑 부여잡고 온종일 울기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도시생활 정리하고 농사 도전
당연히 첫해 대실패로 돌아가
이듬해 배움과 계획으로 준비
일단 새싹 보는 것까지는 성공
다시또 정성스럽게 심고 관리
드디어 수레 가득히 수확 결실
 

경남 함양에 사는 조일선씨가 힘들게 일군 ‘합죽이 농장’에서 고구마가 잘 자라는지 살피고 있다.


이대로 죽을 순 없다

“농사? 니가? 헐∼.”

울신랑은 영혼 없는 눈으로 빤히 바라보다가 끝내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여기서 나빠져 봐야 얼마나 나빠지겠어! 근데 왜 하필 농사냐구? 납득은 가는데 이해는 안된다는 심정을 그의 넋 나간 표정을 통해 알 수 있었다.

내게 강박장애가 찾아온 것은 40줄이 넘어선 2019년 어느 겨울이었다.

잇몸 치료차 들른 치과에서 의사가 내게 “잇몸이 너어무 안 좋으시네요!” 하고 한마디 툭 던졌는데 그것이 비수가 돼 내 머릿속을 헤집어놨던 것이다. 건강염려증이 지나쳤던 탓일까? 나는 곧 ‘침 삼킴’이라는 멈출 수 없는 늪 속으로 빠져들었고, 밤에 잘 때 ‘이 악물기’버릇이 생겼다.

치아 보호용 스플린트를 끼우면 통증이, 스플린트를 빼면 이 악물기로 치아가 뭉개지는 악순환이 반복됐다. 우울증 약을 복용했지만, 불안증세는 더 심해졌다. 명상과 마음수련은 강박증엔 오히려 독이 되었다. 극심한 수면장애가 이어졌고 공황장애가 찾아왔다.

30초 간격으로 계속되는 합죽거림 때문에 안면 근육에 경련이 오고 가만히 앉아서 TV를 보는 것조차 힘들어졌다. 하고 싶은 것도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울신랑 멱살만 부여잡고 온종일 우는 게 전부였다. 나는 그렇게 빠르게 망가져갔다.

내 삶의 첫 지푸라기
2020년 봄.

나는 도시 생활을 정리하고 경남 함양에 지인의 땅을 조금 샀다. 150평 남짓 되는 나만의 작은 공간은 논을 밭으로 성토하고 몇년간 농사를 짓지 않은 터였다. 성토한 흙은 마사토였는데 미국 서부 시대에나 나올법한 황야처럼 붉은 흙먼지가 일었다. 그것은 흡사 거울에 되비쳐진 내 모습같이 거칠고 메말랐으며 반쯤 죽어 있었다. 

내가 농사를 시작하게 된 이유는‘아무 생각 없이 뭔가에 몰두’할 일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힘든 육체노동은 강박증 환자에게 확실히 효과가 있었는데 나는 기왕이면 뭔가 생산적인 일을 하고 싶었다. 구도자의 심정인 내게 황량한 땅은 교회였으며 삽이라든가 곡괭이는 일종의 십자가 같은 거였다.

농사 초보였고 체력도 부족했지만, 나는 일단 밭 갈기부터 시작했다. 농기계도 없었고 가축도 없었다. 그래서 급한 대로 당분간 불쌍한 울신랑을 사용하기로 하고 알루미늄 갈퀴를 손에 쥐여줬다. 나 살려보겠다고 울신랑은 성난 멧돼지처럼 텃밭을 뛰어다녔다. 물은 인근 계곡물을 이용했고 메마른 땅에서 키워낼 작물은 참나물과 팥과 호박고구마를 선택했다. 쟁기 들고 가다 쉬기를 반복하면서 어느덧 그해 여름이 홀딱 지나갔다. 그리고 가을이 찾아왔다.

당연히 우리들의 첫 농사는 대실패로 끝났다.

“애무만 하다 끝났네. 된장 맞을!”

예상은 했지만, 속이 상한 나는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조금 나아졌던 합죽거림도 다시 재발했다.

“식물인간이 마사지 좀 한다고 깨어나겠노. 아직 젊잖아. 시간이 흘러야제.”
가을 햇살을 등지고선 울신랑이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아직 우린 젊지. 생명을 잉태하고 출산하는 게 어디 쉬운 일이랴! 건강한 육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고 하지 않았던가! 물만 뿌리고 갈퀴질만 한다고 땅이 살아나진 않는다. 그해 우리들의 땅은 나만큼이나 기름지지 못했다.

“여보야!”

“왜?”

“저녁놀이 왜 저리 슬프노!”

울신랑이 내 어깨를 슬그머니 끌어당겼다.

“우리 아직 안 죽었다.”

좌절과 희망, 갈림길에서
2021년 초여름. 나의 이듬해는 여느 때처럼 분주했다. 하지만 작년과 차이점이 있다면 체계적인 ‘배움과 계획’이었다. 우선 잘 먹고자 노력했다. 강박증은 내버려 두고 기초체력부터 길러나갔다. 안되는 건 과감하게 버리고 되는 것부터 하나씩 쪼개서 조지자고 마음먹었다.

대인기피증 때문에 사람과의 만남엔 지장이 있었지만 유튜브, 인스타그램 등 각종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농사와 관련된 기초 지식을 섭렵하기 시작했다. 지역 농업기술센터에 개설된 농업강좌도 수강해 텃밭 설계부터 모종 심는 법, 열매를 기르며, 작물을 수확하는 법을 차례차례 배워나갔다. 우리 땅에는 조그맣게 이름표를 써 붙였다.

“합죽이 농장?”

어디서 구했는지 중고 경운기를 끌고 나타난 울신랑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나는 장애를 온전히 내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게 작명의 이유였다. 작년과 달리 올해는 한가지 모종에 집중해 보기로 하고 배추를 선택했다. 8월이 넘어감과 동시에 나는 밭에 씨를 뿌렸고 얼마 안 가 새싹을 보는 것까진 일단 성공했다.

그러나 친환경 판타지에 사로잡힌 대가였을까? 곧 병충해가 찾아왔고 내 새끼 중에 살아남은 녀석은 하나도 없었다.

“농약 좀 칠 걸 그랬네!”

울신랑은 폴싹 주저앉으며 끊었던 담배까지 꼬나물었다. 쿠르르― 잿빛으로 변한 하늘에서 빗방울까지 떨어졌다. 그냥 포기해 버릴까도 생각했다. 그때 놔버렸다면 아마 내 삶은 끝내 가라앉았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좌절의 울음을 삼키고 꺾었던 무릎을 다시 폈다.

8월 말, 배추씨를 다시 뿌리기에는 늦은 시기였다. 그래서 모종을 샀다.

우리는 배추 모종을 위해 밭을 새로 설계했다. 신랑의 미칠 듯한 괭이질에 땅속에서 돌멩이가 이리저리 튀었다. 분명 논이었을 텐데 밑이 돌밭이라니, 희한한 일이었다. 우리는 골라낸 돌들을 근처 한곳으로 던져버렸다.

다음날은 퇴비 포대를 끌고 와 길게 늘어놨고, 그다음날은 퇴비를 골고루 편 뒤에 경운기로 로터리 작업을 했다. 해가 뜨고 또 해가 지고 그러기를 반복한 어느 날…. 우리는 드디어 배추 모종을 심게 됐다. 뿌리 사이로 바람이 들어가서 상하지 않도록 정성스럽게 모종을 꾹꾹 눌러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날 밤은 유난히 잠이 오지 않았다. 하루하루 버텨온 전쟁 같은 시간 속에서 처음으로 뭔가 희망 같은 게 내 속에 자라고 있다는 걸 느꼈다.

“여보야, 우리 괜찮아지겠지?”

곤히 잠든 울신랑은 입꼬리를 히죽거리며 내 곁을 지키고 있었다.

나는 그의 손을 살포시 잡았다.

흙으로 된 캔버스와 삶의 흔적
한 주가 지나고, 합죽이 농장의 배추는 고맙게도 잘 자라줬다. 그동안 잡초도 솎아내고 무너진 이랑도 바로잡았다. 우리는 화학의 힘을 빌려 야생과의 부단한 싸움에서 처음으로 이겼고, 합죽이 농장에서 곤충들은 서식지를 옮겨 갔다.

또다시 한 주가 흐르고 또 한 주가 흘렀다. 소중한 내 새끼들은 하루가 다르게 솟아나고 푸르러 갔다. 10월 중순, 찬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나와 울신랑은 수확을 앞둔 푸른 바다 위에 서 있었다. 오랫동안 나를 괴롭혔던 강박증이 사라진 건 아니지만 살아갈 만했다.

“고생했어! 앞으로도 계속 고생하자.”

부쩍 늘어난 그의 흰머리가 바람에 나부꼈다. 그해 11월 말, 우리는 생애 처음으로 정성스레 키운 생명을 수레 가득히 수확했다. 내가 키운 건강한 먹거리는 그대로 내 피와 살이 됐고 나는 아주 느리지만, 병마 이전의 삶을 조금씩 회복해갔다. 주위에 사람들이 모이고 정을 나눌 수 있는 이웃이 생겨났다.

“계속 여기서 살까?” 울신랑이 물었다.

나의 삶은 씨앗 속에서 자라나 비바람을 느끼고 새소리를 듣는 것이고 싶다. 그러다 정해진 수명이 다하면 수확되고 다시 봄을 기다리는 영원한 흐름의 일부이고 싶다.

“나는 흙에 묻힐 거야.”

2022년 초, 함양군에 전입신고를 했다. 이 땅에 뿌리내리기로 한 선택은 잘한 결정이었다. 강박장애와의 지루한 싸움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지만, 나는 받아들이는 법을 배웠다. 내 곁에는 앞으로도 함께 싸워줄 텃밭이 있고, 사랑하는 울신랑이 있다. 나는 오늘도 흙으로 된 캔버스 위에 삶을 써 내려가고 있다.

먼 훗날, 신이 우리들의 삶을 수확하고 흡족해하시길 기원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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