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방송·연극·영화 아우른 식민지 지식인이 도착한 곳은

최원형 2022. 8. 12.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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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의 무용가 최승희(1911~1969)의 큰 오빠 최승일(1901~1966)은 여느 일제강점기 문사(文士)들처럼 '작가'로 알려졌으나, 그의 활동은 단지 문인의 영역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최승희의 무용이 그러했거니와, 문화적 민족주의는 식민주의에 무력하게 순응하는 데 그칠 수밖에 없었고 최승일은 일제 선전 영화 <지원병> (1941년)을 제작하는 등 친일 협력의 길을 밟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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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가 동생 최승희의 삶과 일본에서의 인기에 대해 인터뷰하는 최승일의 모습.(<조선신문> 1938.2.25)

라디오 연극 키네마
식민지 지식인 최승일의 삶과 생각
이상길 지음 l 이음 l 3만2000원

전설의 무용가 최승희(1911~1969)의 큰 오빠 최승일(1901~1966)은 여느 일제강점기 문사(文士)들처럼 ‘작가’로 알려졌으나, 그의 활동은 단지 문인의 영역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카프’(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의 발기인 가운데 하나였던 그는 최초의 라디오 방송 ‘경성방송국’(JODK)에서 피디로 일했으며, 연극을 기획하고 영화를 제작했다. 동생 최승희가 세계적인 무용가로 성장하는 데에도 한몫을 담당했다.

문화학자·사회학자 이상길(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 교수)이 쓴 <라디오 연극 키네마>는 이 ‘최승일의 경우’를 통해 일제강점기 미디어 문화를 탐색하는 책이다. 최승일은 카프 결성에 주도적인 구실을 하는 등 애초 사회주의 계열의 문인이었으나, 경성방송국 개국(1927년) 전후로 조선총독부 경성 체신국에서 문서계원으로 일하며 조선어 방송 제작에 참여하는 등 당시의 새로운 미디어에 적극적인 행보를 보였다. 특히 집중했던 라디오 창작극 제작뿐 아니라 연출, 섭외, 아나운서 역할까지 두루 맡아서 했는데, 지은이는 그가 방송국 활동을 통해 경제적·이념적·심미적 차원에서 “스스로 온전하게 근대적인 주체로 설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했던 것이라 풀이한다. 물론 라디오를 비롯한 근대 미디어의 세계 역시 식민지적 모순에서 벗어날 수 없었지만, 근대 문화의 독특함 속에서 새롭게 무언가를 찾으려 했던 시도가 있었다는 것이다. “민중의 현실에 기초한 변혁적인 내용을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미디어에 실어 널리 전파하는 것, 거기에 1920년대 중후반 최승일이 보여준 근대 미디어관의 핵심이 있었던 것이다.” 최승일이 동생 최승희에게 전인미답이나 다름없던 예술인 무용을 권유한 것도 이런 맥락 위에 놓인다.

경성방송국(JODK) 개국 이후 최초의 우리말 방송극 <명예와 여신> 방송 장면. 왼쪽부터 출연자 신일선, 이소연, 박승진.(<매일신보> 1927.3.2)
1941년 3월 <경성일보>에 실린 일제 선전영화 <지원병> 개봉 광고.
<매일신보>(1926.11.14)에 실린 최승일의 사진. 이음 제공

그러나 다양한 미디어 실천을 거치며 최승일이 나아가려 했던 길은 구조적 한계 아래에서 조금씩 굴절됐다. 30년대 초반 잠시 프롤레타리아 연극에 힘을 쏟았던 그는 계급 관점을 포기하고 ‘조선적인 것’의 ‘세계화’를 중시하는 일종의 ‘문화적 민족주의’ 태도로 나아간다. 최승희의 무용이 그러했거니와, 문화적 민족주의는 식민주의에 무력하게 순응하는 데 그칠 수밖에 없었고 최승일은 일제 선전 영화 <지원병>(1941년)을 제작하는 등 친일 협력의 길을 밟는다. 일제 패망 뒤 최승일과 최승희 일가는 북한으로 갔고, 한국에서 두 남매는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나란히 이름을 올리고 있다.

지은이는 “근대 미디어의 성장에 힘입어 생계의 걱정 없이 새로운 문예를 계발하고 민중을 위해 말하는 지식인으로 굳건히 서겠다는 최승일의 욕망 자체가 일종의 허상 내지는 자기기만일 수밖에 없었다”고 짚는다. 애초 근대화와 식민화가 한 쌍을 이루듯, 근대 미디어 역시 식민권력의 자장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최승일의 삶과 생각은 일제강점기 미디어 문화공간을 “자세히, 입체적으로 들여다보게 해주는 렌즈”가 된다.

부록으로 근대 미디어와 문화에 관한 최승일의 글 24편을 현대어로 옮겨 발표 시기순으로 실었다. 대표 산문으로 꼽히는 ‘라디오, 스포츠, 키네마’(1926년)는 이런 문장으로 끝난다. “현대의 문명은 아무리 하여도 라디오, 스포츠, 키네마이다. 언제나 이들의 문명도 우리와 거리가 가까워지려는고?”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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