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가슴에 박힌 총탄의 비밀 "'김구 처치' 획책 중이다"
백범 상대의 일제 암살공작 추적해
1930년대 임시정부와 정세 역학까지
제국의 암살자들
김구 암살 공작의 전말
윤대원 지음 l 태학사 l 1만9500원
백범 김구의 글씨는 1938년 후반기부터 확연한 떨림을 동반한다. 보는 이들은 ‘떨림체’라 불렀고, 백범은 ‘총알체’라 이르곤 했다. 그의 심장 주변에 박힌 총탄 때문에 붓 든 손이 흔들린 탓이다.
백범은 윤봉길 의거(1932년 4월) 뒤 중국 저장성 자싱으로 도피했다. 상하이 임시정부(임정)와는 거리를 둔 채, 자신의 군인 양성 등에 치중하던 때다. 윤봉길 의거 후 중국국민당 정부의 지원 자금은 백범에게 몰렸으므로 백범의 ‘거리두기’는 그가 속한 한국독립당이나 임정 인사들로부터 비판과 불신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1935년 한국독립당 등 5개 독립운동 정당이 통합당을 출범하고자 한다. 김원봉계의 주도로, 전제는 임정 해체였다. 백범은 반발했고 다시 임정(당시 항저우)에 복귀, 사수파들과 재건에 나선다. 이런 논리였다. “임시정부를 구성하는 자연인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허물을 나무랄 수 있지만 법인인 임시정부의 적혈구인 정부 자체에 대해서는 누구도 손을 댈 수 없음을 정중히 언명한다.”(<광> 7호 투고, 재인용)
같은 해 말 백범은 “임정의 여당이자 자신의 정치적 기반”인 한국국민당을 창당한다. 중국 임정이 백범 체제로 실효적 전환을 한 때이며, 관내 정당도 사회주의 민족혁명당과 민족주의 한국국민당으로 양분된다.
백범은 임정을 후난성 창사로 옮긴 뒤 이청천의 조선혁명당 등과 3당 통일을 추진한다. 1938년 5월7일, 이를 위해 조선혁명당 당사인 남목청에 모인 이들에게 권총을 들고 들이닥친 청년이 네 발을 쏜다. 첫 발은 백범, 나머지는 현익철(사망), 유동열(중상), 이청천(경상)을 겨눴다. 병원은 백범이 숨질 것으로 보고 입원 수속도 밟지 않다 숨이 서너 시간째 이어지자 수술했다.
범인은 조선혁명당 당원 이운환. 김구파의 조선혁명당원에 대한 지급금의 차별, 조선혁명당 내 김구 비판 세력(박창세·강창제 등)의 제명 등이 이유였다.
이것이 지금까지 대체로 알려진 바다. <제국의 암살자들>은 일제의 극비문서 하나를 더 분석해준다. 경찰부 상하이 파견원 히토스키가 1935년 8월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에게 보고한 ‘특비제3호 대김구특종공작에 관한 건’이다.
“…헤로인 밀매 관계로 출입하고 있는 박제도를 통해 아버지 박창세를 회유하고 동인의 손에 의해 김구를 처치하려고 획책 중이다… 이미 동인의 차남 박제건이 여운형의 주선에 의해 권투선수가 되어 형 박제도와 함께 조선에 들어가기를 희망하고 있으므로, 총영사관과 협력하여 동인 등의 조선 귀국에 편익을 주고…”
이운환에게 총을 준 박창세는 1926년 상하이 일본총영사관을 공격하거나 1933년 백범 체포 공작을 거든 밀정(석현구)을 이운환 등에 시켜 암살한 인물이다. 실제 두 아들은 1936년 4월 귀국했고, 총격사건 뒤 재지나파견총사령부에서 일하는 변절자 박창세가 확인된다.
역설적이게도, 밀정이 더 압박해올수록 백범의 존재는 커졌다. 반대의 해석도 다를 게 없다. 남목청에서의 구사일생이 정점 격이다. 바로 <제국의 암살자들>이 주목한바, 1920~30년대 중국 관내 독립운동사에 집중하되 일제의 암살 공작을 추적해 백범이 놓인, 더불어 정세 속 임시정부가 놓인 ‘포위망’을 조밀히 짚었다.
달리 강조되진 않았으나, 마침내 1941년 백범 주도의 좌우연합정부가 서기까지의 기점으로 1922년은 중요해 보인다. 옹근 100년 전, 연해주, 서울서 제각기인 임시정부들이 1919년 9월 통합 출범(상하이)했으나 3년 만에 무정부 상태로 전락한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기호파)의 통합임정 주역 안창호(서북파)에 대한 견제, 국무총리 이동휘(사회주의)와의 파벌적 갈등이 상류였다면, 하와이 교포들이 모은 애국금의 독단 집행(이승만), 모스크바 레닌이 준 지원금의 독단 집행(이동휘) 등 재정 갈등이 하류에서 혼탁했다. 1921년 상반기 대통령과 총리는 미국과 러시아로 돌아가고, 1922년 신규식 내각마저 총사퇴하면서 방치된 임정에서 백범의 역할이 점차 막중해졌다. 3·1운동을 계기로 상하이로 망명, “(임시)정부 문지기”를 안창호에게 청원해 초대 경무국장으로 임정과 인연 맺은 백범은 이후 내무총장, 국무령, 종내 주석까지 맡게 되었으나 이를 스스로 “문지기 자격이 진보된 것이 아니라 명예가 쟁쟁하던 인가가 몰락하고 고대광실의 걸인의 소굴이 된 것과 흡사하다” 말한다(<백범일지>).
백범이 당면하기로 임정의 재건, 지향하기로는 관내 통일전선, 한·중 동맹을 위해 강구한 전략이 바로 독립 의혈투쟁이며 군사조직이다. 1930년대 들자마자 만보산 사건 등에 격앙한 중국인의 반한감정, 상하이 사변 후 중국정부의 장기항전 노선(일제와의 일종의 타협)까지 임정에 우호적인 정세란 없었다.
백범이 “전적으로 내 손에 조직된 단체”라 공표한 한인애국단의 일원으로 이봉창이 일본 도쿄에서 천황에게 던진 폭탄(1월), 윤봉길이 상하이에서 일제 고위관리들을 향해 이어 던진 폭탄(4월)은 기폭장치를 넘어 역사적 시한장치로 터진 셈이다. 1932년, 빈사의 임정으로부터 10년 뒤다. 백범은 두 의거 사이 조선 총독과 타이완 총독 암살도 지령까지 내려 추진했다. 말하자면 동아시아 벨트의 ‘암살 타격’.
일제가 백범에게 건 현상금은 당시 60만위안, 지금 한화 198억원가량(보훈처 설명)이다. 즈음 일본총영사관이 한인첩보비 예산을 연 3000원에서 6240원으로 갑절 증액 요구했고, 밀정 회합비, 한독당 간부매수비, 한인과의 비밀회합비 등이 개별명목으로 집행된 사실이 확인된다.
책에서 주요하게 다룬 백범 암살 공작은 세 차례로, 공산주의자에서 밀정으로 변절한 오대근, 이중간첩 위혜림이 각기 등장한다. 독립운동권 내 파벌 갈등이 심했으니 “만들어진 밀정” 또한 없지 않았을 텐데 그 ‘탁류’에서도 독립을 위해 자신을 건사했던 백범이 정작 해방 뒤 경교장에서 안두희의 총탄에 영면(1876~1949)한 사실, 나아가 2022년까지도 그 공작의 ‘진실’이 드러나지 않은 사실 앞에서 지난 100년은 움츠릴 만하다.
자료가 부족한 대목에서 추정이 적이 있으나, 저자가 역사의 대중적 이해를 위해 글쓰기 방식에 애쓴 흔적이 또 적지 않다. 그의 말마따나 뿌리 깊은 “(친일) 정신의 식민지화”에 맞서고자 하는 역사학자의 의지라 하겠다.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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