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고통이자 축복이었던 순금의 기억을 찾아

최재봉 입력 2022. 8. 12. 05:05 수정 2022. 8. 12.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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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시국 관련 실종자 찾는
연인의 기억 및 역사 순례
야학연합회사건 연루 경험 살려
"여기까지 오는 데 오래 걸렸다"
장편 <사자가 푸른 눈을 뜨는 밤>을 낸 소설가 조용호. “시대의 야만을 배경으로 죽음이라는 인간 보편의 숙명, 그 어두운 너머를 보면서 간절한 그리움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라고 ‘작가의 말’에 썼다. 민음사 제공

사자가 푸른 눈을 뜨는 밤
조용호 지음 l 민음사 l 1만4000원

“모든 죽음은 의문사일는지 모른다. 그가 혹은 그녀가 왜 죽었는지 알려 주는 사망진단서는 단지 현상에 대한 설명 자료일 뿐이다. 왜 하필 그 나이, 그 시각 그곳에서 그렇게 숨을 멈추어야 했는지, 저 수많은 죽음들의 무수한 사연의 배경은 신조차 모두 알 수 없지 않을까. 하물며 죽음의 흔적도 남지 않은 실종이란 겹으로 싸인 의문 덩어리인 셈이다.”

조용호의 소설 <사자가 푸른 눈을 뜨는 밤>은 의문사와 실종 사이의 좁은 길을 힘겹게 헤치며 나아간다. 소설은 1980년대 초 시국 관련 사건으로 경찰에 붙들려 간 뒤 흔적이 사라진 한 인물의 행방을, 그로부터 거의 40년 뒤에 두 사람이 쫓아 나서는 과정을 그린다. 사람의 반생에 해당할 정도로 긴 세월은 이들의 행보에 여러 장애물과 함정을 마련해 놓는다. 그것들을 뚫고 시간을 거슬러 오르는 두 사람의 추적은 80년대라는 폭력과 죽음의 연대를 향한 역사 순례를 겸한다.

그 시절, 이른바 ‘야학연합회 사건’이라는 게 있었다. 대학생들이 또래 노동자들에게 배움을 나눠 주던 야학 모임 관련자들을 한데 엮어 거창한 사회주의 혁명 음모를 덮어씌우려던 시도였다. 소설 주인공 ‘나’와 그의 연인 하원 역시 야학 교사로 수배 대상이 되자 함께 서해의 한적한 바닷가 집으로 몸을 숨긴다.

“그때 우리는 세상의 외딴 골목으로 도피하는 중이었다. 바깥 세상에 많은 인연들을 두고 왔지만, 우리는 더 이상 도망갈 곳 없는 절벽 앞에 이승의 초라한 텐트를 친 셈이었다. 우리 말고는 아무것도 아니었고 아무도 없었다.”

체포의 손길을 피해 도망쳐 온 것임에도 젊은 연인들은 그 위태로운 도피처를 사랑의 성소(聖所)로 바꾸어 놓는다. 혼자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이와 함께라면, 고립과 단절은 저주라기보다는 축복에 가까웠다. 허름한 외딴 집에서 단둘이 보낸 열흘 남짓이 그들 청춘의 절정이었다. 하원을 잃고 오랜 세월이 지난 뒤 그 집을 다시 찾은 ‘나’가 그 집을 가리켜 “순금 같은 기억의 성소”라 부르는 것을 보라.

순금의 날들은 오래가지 못했다. 생필품을 사러 읍에 나갔던 ‘나’가 불심검문에 걸려 붙잡히고, 남영동의 저 악명 높은 치안본부 대공분실로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당한 데 이어 강제로 군에 입대하게 되면서 하원과는 영영 연락이 끊기고 만다. 제대 뒤 어디에서도 하원의 소식이나 흔적은 만날 수 없었고, 그렇게 하원과 연이 끊어진 세월이 무려 40년 가까이 흘렀다. 차라리 하원의 죽음을 확인할 수 있다면 깨끗이 포기하겠지만, 하원은 어디까지나 ‘실종’ 상태였다.

그 사이에도 간간이 하원의 흔적 찾기를 이어 왔던 ‘나’가 본격적으로 추적에 나선 데에는 삼십 대 후반 여성 희연의 존재가 결정적이었다. 시위가 한창이던 광장에서 우연히 마주친 희연은 젊은 하원의 모습을 빼닮았고, 여러 정황상 저 바닷가 사랑의 성소에서 둘 사이에 잉태되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나’는 희연을 두고 “하원의 젊은 아바타 같은 존재”라 표현하고, 소설이 진행되면서 희연 역시 생모를 찾는 마음으로 하원의 행적을 더듬는다.

일인칭 화자 ‘나’의 시점으로 전개되는 소설 중간중간에는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보고서가 삽입되어 입체감을 더한다. 실종된 하원이 혹시 치안 당국에 의해 살해된 것은 아닌지, 신고 접수를 받고 공식적으로 조사를 벌인 결과를 담은 문건이다. 조사 개시 및 방향, 참고인 및 피진정인 조사, 경찰의 사찰 여부, 타살 가능성 등의 항목을 거쳐 진상 규명 불능 사유, 사건에 대한 평가 등의 항목으로 이어지는 이 보고서는 하원의 실종을 건조한 문장에 담은 공식 기록이라 하겠다.

당시 하원을 체포했던 경찰과 야학 학생이었던 순영의 어머니 등 관련자들의 증언은 공식 기록의 빈틈을 메꾸며 ‘나’와 희연이 사태의 진상에 조금 더 다가갈 수 있도록 돕는다. 하원의 행적을 쫓는 과정에서 두 사람은 그 시절 갑자기 사라졌던 ‘나’를 기다리며 하원이 남긴 편지 뭉치를 발견하는데, 편지 속 하원의 목소리는 지금 ‘나’와 희연의 추적을 격려하며 다그치는 것처럼 들린다.

“당신, 지금도 우리가 떨어져 있지만 교신하고 있는 것 맞지요? 언제쯤 돌아올 건지 타전해 주세요. 온 가슴을 열고 당신을 기다립니다. 어디까지 왔나요, 당신.”

하원과 ‘나’의 간절한 그리움이 40년 가까운 시차를 두고 마침내 해소될지 여부는 독자가 확인할 몫으로 남겨 두자. 야학연합회 사건은 실제로 있었던 일이고, 작가 자신 그에 연루되어 남영동 대공분실로 붙들려 가 조사를 받은 바도 있다. 소설 속 야학 동료이자 ‘나’의 룸메이트였던 수호는 당국의 사건 조작에 항의하는 유인물을 뿌리고 도서관 옥상에서 몸을 던진다. 소설 속 정황과 똑같지는 않아도 이 역시 작가가 겪고 본 일들에 바탕을 두고 있다. ‘작가의 말’ 한 대목이 사무친다.

“여기까지 오는 데 오래 걸렸다. 그 시절 시장통 단칸방에서 어린 강학과 학강 들이 서로 가르치고 배우던 풍경으로부터 사십 년, 그 기억이 박제가 되어 남아 있다가 되살아나 세상 밖으로 이야기가 되어 나오려고 꿈틀대던 때로부터는 팔 년이 지났다. 오래 품어온 사람과 사랑과 회한을, 왜 어디서 무엇 때문에 우리는 살고 죽는지 풀 길 없는 영원한 의문을, 여기 꺼내 놓는다.”

소설 주인공 ‘나’는 다른 직업을 가진 채 소설 쓰기를 병행하는 인물로 그려지는데, 기자 일을 하면서 소설을 아울러 쓰는 작가 자신을 떠오르게 한다. 그가 죽은 수호에게 변명 삼아 건네는 말에서 소설 쓰기에 대한 작가의 태도를 짐작하게 된다.

“네가 떠나고 난 뒤 어쭙잖게 밥벌이를 하면서 소설가의 꿈을 꾸어 왔다. 쓸쓸한 오지의 넋두리 같은 글이지만 그래도 내가 이 척박한 세상을 견디는 힘이었으니 비웃지는 말거라.”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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