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연료처럼 태운 상처..발리의 파도 타기로 씻어낼 수 있을까

진달래 2022. 8. 12.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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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움'은 영혼이 재가 되도록 태운다는 뜻으로 주로 간호사 세계에서 쓰인 은어.

지난해 말 경기 의정부 을지대병원 기숙사에서 '태움'을 당한 20대 신입간호사가 극단적 선택을 했다.

태움은 간호사 3명 중 1명이 경험했다(보건의료인력 실태조사 2020)고 답한, 살아 있는 악습이다.

다영은 태경이 간호보조인력으로 일했던 건강검진센터의 간호사이자 '태움'의 피해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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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석의 첫 장편소설 '덕다이브'
'태움' 현장에서 벗어나 서핑 강사로
방관자로서 괴로움 고스란히 내면에
극단적 자본 논리 속 자기착취 문제도
동시대에 필요한 윤리·용기를 말하다
게티이미지

'태움'은 영혼이 재가 되도록 태운다는 뜻으로 주로 간호사 세계에서 쓰인 은어. 엄격한 신입 교육이라는 일부의 변명에도 과도한 인격 모독 등으로 이제는 명백한 직장 내 괴롭힘으로 인식돼 있다. 그렇다고 사라진 것은 아니다. 지난해 말 경기 의정부 을지대병원 기숙사에서 '태움'을 당한 20대 신입간호사가 극단적 선택을 했다. 태움은 간호사 3명 중 1명이 경험했다(보건의료인력 실태조사 2020)고 답한, 살아 있는 악습이다. 피해자와 가해자에 방관자, 목격자까지 뒤섞인 폐습과 무관한 이들은 얼마나 될까. 소설 '덕다이브'는 목격자 혹은 방관자의 시선으로 그 현실을 파고든다.

이현석 작가의 첫 장편 '덕다이브'는 인도네시아 발리의 한인 서핑캠프가 배경이다. 주인공인 '태경'은 발리에 온 지 3년 된 서핑강사. 사장이 캠프 홍보를 위해 데려온 웰니스 인플루언서 '민다'가 자신을 모르겠냐며 본명(다영)을 밝히면서 주인공의 일상이 흔들린다. 다영은 태경이 간호보조인력으로 일했던 건강검진센터의 간호사이자 '태움'의 피해자였다. 다영의 등장으로 덮어뒀던 전 직장의 기억이 살아난다.

다영을 향한 책임 간호사의 인신공격은 끝이 없었다. "넌 잘하는 게 하나라도 있니?" "인서울 나오면 뭐해? 4년제 나오면 뭐하냐고?" 업무배제 조치로 다영이 하루 종일 탈의실에 머무는 일도 빈번했다. 목격자인 태경은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저 '순리'대로 내 앞가림에 바빴다. 과거를 침묵한 채 다영에게 서핑을 가르치며 아무렇지 않게 지낼수록 태경은 괴롭다. 그 시절엔 죽어가는 듯 무표정한 얼굴이었던 다영이, 해맑은 표정으로 말을 걸 때면 낯설고 두렵다. "방관과 동조의 경계 위에 서 있었던 자신의 모습"이 불쑥불쑥 그를 찔러대서다.

2017년 중앙신인문학상으로 등단한 이현석 작가는 직업환경의학과 전공의로서 생생한 의료 현장을 소설에 담았다. 창비 제공

소설은 주인공의 감정선을 따라간다. 단순히 미안함이나 자괴감만은 아니다. 태움은 목격자도 피해자가 겪는 고통의 많은 부분을 경험하게 한다는 점을 태경을 통해 엿볼 수 있다. 자신도 괴롭힘을 당할까 두렵고 불안한 나날이었다. 자기밖에 믿을 수 없는 세계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날을 세우기 쉬웠다.

지나고 나니 모든 것이 허탈하다. "물 마실 시간조차 없다고 출근하자마자 머그컵에 부은 맹물부터 마시던 우리. 화장실도 제대로 갈 수 없어 방광염을 달고 살던 우리". 그 우리에는 태경, 다영도 있지만 책임간호사도 포함된다. 사람을 수단으로 삼는 극단적 자본의 논리에 밀려 조금의 여유도 없는 일터, 그 속에서 자기 자신조차 착취하는 사람들이다. 모두가 "사람을 연료로 태워가며 돌아가는 이 해괴한 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는 미생이다. 소설 밖 우리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덕다이브·이현석 지음·창비 발행·300쪽·1만6,000원

이 작품은 "무턱 댄 위로를 건네지 않아서"(김혼비 작가) 불편하지 않다. 그저 서로를 밀어내게 하는 사회에서 타인의 손을 잡는 순간, 즉 회복의 시작점에 서 있는 이의 이야기다. 내면의 괴로움이 한계에 다다르고 고통이 외부로 폭발해 생채기가 나는 순간, 태경의 시선 역시 '나'에서 '너'로 확장된다. 발리가 구원이 될 것 같은 느낌이 착각이라고 깨닫는 때기도 하다. 단절된 세상에서 홀로 평안할 수는 없다. 그렇게 작가는 우리 시대에 필요한 윤리와 용기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이번엔 "그를 구하고 스스로를 구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거대한 파도를 맞닥뜨린 다영을 향해 힘차게 나아가는 태경을 통해.

현직 직업환경전문의인 작가의 경험은 소설을 더 생생하게 만든다. (본보 기사 "의료 에세이, 환자 얘기 편취 않도록 가이드라인 필요" 참고) 코로나19 유행 전까지 작가가 실제 즐겼다는 서핑에 대한 묘사도 영상을 보는 듯해 서핑 도전 욕구를 자극한다. 제목인 '덕다이브'는 "바늘을 꿰는 것처럼 수면 아래로 파고 들어가" 올라타기 힘든 거대한 파도를 흘려 보내는 서핑 기술을 뜻한다. 작가는 이를 우리에게 필요한 삶의 태도에 빗댄다. 발리를 상징하는 활화산 이름인 '아궁', 일·노동을 뜻하는 '까르야' 등 인도네시아어로 달린 각 장(章) 제목은 소설 속 공간인 발리를 독자에게 보다 가깝게 끌어 온다.

진달래 기자 az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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