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일의 좋은 정부 만들기] 제대로 된 재정준칙을 바라며

김태일 고려대 교수·좋은예산센터 소장 2022. 8. 12.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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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이 전쟁을 마친 오디세우스는 귀향길에 세이렌의 노래가 울려 퍼지는 해협을 통과하면서, 자신의 몸을 배의 기둥에 묶어버렸다. 그렇지 않으면 노래의 유혹을 못 이겨 바닷속으로 뛰어들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오디세우스는 의지박약한 인물일까 아니면 현명한 사람일까. 그는 아킬레스와 함께 무력으로 이름 높은 용장이자, 트로이 목마라는 계략을 제시해 전쟁을 승리로 이끈 지장이다. 그래서 제약을 가하지 않으면 자신을 파멸로 이끌 선택을 할 것을 알았기에 미리 자신을 구속한 것이다.

김태일 고려대 교수·좋은예산센터 소장

재정준칙이라는 제도가 있다. 정부 재정 운용에 미리 제약을 가하는 것이다. 가령 국가채무 비율은 60%를 넘기지 못한다, 매년의 재정수지 적자는 3%를 넘지 못한다는 식으로 못 박아 두는 것이다. 경제학은 선택지 많을 때가 적을 때보다, 제약 없을 때가 있을 때보다 효용을 높인다고 가르친다. 그런데 왜 정부 재정 운용에는 미리 제약을 가해서 선택지를 줄일까. 경기 상황에 따라 세금이 많이 걷히는 해도 있고 적게 걷히는 해도 있다. 하지만 국방, 치안, 교육, 복지 등 정부지출은 안정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세금 적게 걷혔다고 경찰관을 줄일 수는 없고 세금 많이 걷혔다고 난데없이 보도블록을 교체하는 것도 곤란하다.

현명한 정부라면, 호경기 때 많이 거둔 세금을 비축했다가 불경기 때 풀 것이다. 그때그때는 재정수지 진폭이 크더라도 중장기적으로는 안정적인 재정이 이뤄지도록 할 것이다. 그런데 왜 미리 제약을 가해서 신축적인 운용을 억제할까? 정부는 그다지 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간의 정부 재정 운용 경험을 보자면, 불경기 때는 대규모 적자를 통해 대량의 돈을 푼다. 하지만 호경기 때 여유분을 비축하는 경우는 드물다. 많이 들어온 만큼 많이 쓴다. 이러니 늘 적자이고 국가채무는 늘어날 수밖에 없다.

국가채무 증가 가속…‘고삐’ 필요

왜 정부는 중장기적인 재정 안정성은 외면하고, 호시탐탐 돈을 쓰려고만 할까. 정치의 본성이 그렇기 때문이다. 당신이 임기 5년의 정부 운영을 맡았다고 하자. 혹은 임기 4년의 국회의원이 되었다고 하자. 내게 중요한 것은 임기 중 국민한테 인기 얻고 유권자에게 지지받는 것이다. 누구나 혜택 보는 것은 좋아하지만 부담 지는 것은 싫어한다. 재정위기가 오지 않는 한, 구태여 내 임기 중에 깐깐하게 굴 이유가 뭐 있겠는가. 어차피 내 돈도 아닌데 인심 팍팍 쓰고 생색 잔뜩 내는 게 시쳇말로 윈윈 아닌가. 정치인의 관심은 본인 임기 내로 한정되기 마련인데 이를 두고 정치인의 근시안적 속성이라고 한다. 이로 인해 재량에 맡기면 으레 적자를 내고 후세대에 부담을 떠넘기게 된다. 그래서 미리 제약을 가해서 낭비를 차단하고 견실한 재정 운용을 유도하는 것이다.

재정준칙이 널리 퍼지게 된 계기는 1992년의 유럽연합(EU) 창설이다. 유럽연합을 창설하면서 가입국들은 다양한 협약을 맺었는데 그중 하나로 GDP 대비 국가채무 비율 60% 이하, 재정적자 비율 3% 이하를 유지한다는 규정을 두었다. 가입국들은 연합을 맺었더라도 엄연히 개별 국가로 존재한다. 그래서 화폐는 유로라는 공통화폐를 사용하지만, 재정지출은 각국이 알아서 한다. 화폐는 공용인데 재정지출은 각국 맘대로 하면 혼란이 생긴다. 그래서 공통적인 제약을 두고 그 한계 내에서 재정 운용을 하도록 만든 것이다. 이후 재정준칙은 유럽연합 이외 국가들에도 널리 퍼지게 되었다. 많은 나라가 정부지출과 국가채무 증가로 어려움을 겪었는데, 재정준칙이 그에 대한 효과적인 처방이 되리라 여겼기 때문이다.

이제 재정준칙은 100여개 국가에서 시행 중이다. 하지만 우리는 아니다. OECD 국가 중 재정준칙 없는 나라는 우리와 튀르키예(터키)밖에 없다. 우리의 윗세대 정치인들이 남달리 장기적인 시각을 지녔기 때문은 아니겠고, 한국 경제사회구조의 특수성으로 인해 우리의 정부지출 규모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그래서 과거에는 굳이 재정준칙이 필요치 않았다. 하지만 사정이 바뀌었다. 복지국가 진입과 급속한 고령화가 맞물리면서 2000년대 이후 정부지출은 빠르게 늘었다. 2010년대 후반부터 국가채무도 급격히 늘었다. 정부지출과 국가채무 규모 자체만 본다면 아직도 다른 국가와 비교해 큰 편은 아니다. 그러나 증가속도가 매우 빠르다. 이대로 놔두면 우리 재정도 지속 가능성을 고민해야 할 지경이 되었다. 고삐가 필요해졌고 그래서 재정준칙을 도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경기변동 대응·투자장려 장치 장착

기획재정부는 지난 정부 때 재정준칙을 내놓았다. 그런데 이런저런 사정을 고려한 탓에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한 모양새가 되었다. 소위 ‘한국형’이라고 강변했지만 제대로 된 고삐는 아니었다. 그 탓에 보수와 진보 양쪽에서 비판을 받았다. 기재부는 곧 새로운 재정준칙을 내놓는다고 한다. 확정되지는 않았으나 시안을 보면 고삐의 잡아채는 역할은 제법 충실해질 것 같다. 그래서 보수 쪽의 비판은 면할 것 같다. 하지만 진보 쪽의 비판은 더 커질 것만 같다.

재정준칙을 진보 측이 반대하는 이유는 재정 건전성에 치중하느라 필요한 지출을 막을 것이라는 데 있다. 우리의 복지수준은 서구와 비교하면 여전히 낮다. 코로나19로 인한 경제적 타격은 아직 회복되지 않았다. 첨단기술 개발과 탄소중립 실현도 시급하다. 돈 쓸 곳은 많은데 건전성만 앞세우면 재정 운용이 왜곡된다는 우려 때문이다.

타당한 지적이다. 그런데 한 번 생각해 보자. 재정준칙이 써야 할 곳에 못 쓰게 하고 왜곡된 재정 운용을 초래한다면 그렇게 많은 나라가 이를 시행할 리가 있겠는가. 초기의 재정준칙은 확실히 재정 건전성에 치중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2세대 재정준칙은 경기변동에 대응하고 인적·물적 투자를 장려하는 장치를 장착했다. 그로 인해 복잡해지기는 했으나 재정 운용은 한층 바람직해졌고 재정성과는 더욱 높아졌다.

우리의 재정준칙도 이런 역할을 제대로 구현하는 모습이 되었으면 좋겠다. 명심하자. 고삐의 역할은 말을 꼼짝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아울러 복지국가의 대명사로 불리는 스웨덴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재정준칙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참고하자.

김태일 고려대 교수·좋은예산센터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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