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영의 드라마토피아] 탈혼의 시대에 '블랙의 신부'를 본다는 것

김선영 TV평론가 2022. 8. 12.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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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드라마 <블랙의 신부>의 한 장면.

<블랙의 신부>는 넷플릭스 한국 오리지널 시리즈 최초의 치정물로 화제를 모은 작품이다. 상류층 결혼정보회사에서 펼쳐지는 치정 스캔들을 통해 우리 사회의 속물적 욕망을 들여다보는 현실풍자극을 표방하지만, 본질은 이른바 ‘K막장드라마’에 가깝다. 남편의 극단적 선택으로 위기에 처한 여성이 가족 비극의 빌미를 제공한 인물의 파멸을 꿈꾸는 이야기 안에는 불륜, 재벌, 복수, 출생의 비밀 등 막장드라마의 필수 요소가 가득하다.

김선영 TV평론가

그동안 넷플릭스가 선보여온 한국 오리지널 시리즈는 대부분 장르물이었다. 조선 시대 좀비 아포칼립스 <킹덤>, 크리처물 <스위트홈>, 데스 게임물 <오징어 게임>, 코즈믹 호러 <지옥> 등 기존 한국 드라마에서 찾아보기 어려웠던 신선하고 다양한 소재의 장르물은 넷플릭스가 가장 영향력 있는 플랫폼으로 등극한 핵심 비결 중 하나다. 진부한 이야기에 지친 시청자들의 대안처럼 여겨졌던 넷플릭스의 막장드라마 제작은 눈길을 끌 수밖에 없다.

<블랙의 신부>가 방영 전부터 화제를 모은 이유다. 그렇다면 넷플릭스가 만든 막장드라마는 과연 달랐을까. 우선 규모는 달랐다. ‘가성비’의 대명사로 출발한 막장드라마가 어느 순간 안방극장의 지배적인 서사가 되면서 대작으로 진화한 사례가 이미 있긴 하다. 시즌1과 2의 총제작비가 268억원에 달하는 <펜트하우스>가 대표적이다. 8부작인 <블랙의 신부>는 총제작비가 150억원에서 200억원 사이로 알려졌다. 편당 제작비가 <펜트하우스> 3배 이상인 셈이다.

실제로 극의 중심 배경인 상류층 결혼정보회사 ‘렉스’의 화려한 세트에서부터 극의 하이라이트인 최상류층 고객들의 가면무도회장 세트 등 볼거리들이 가득하다. 그야말로 ‘자본의 맛’이 느껴지는 물량공세는 <블랙의 신부>가 풍자하고자 하는 결혼의 상품성을 드러내기 위한 전략이기도 하다. 하지만 한껏 규모를 키운 초호화 펜트하우스로 물신숭배사회를 비꼬려던 <펜트하우스>의 사례에서 보듯 시각적 쾌감을 자극하는 화면은 자주 풍자의 목적을 넘어선다.

<블랙의 신부>의 흥미로운 지점은 규모가 아니라 ‘K막장드라마’의 글로벌화를 꾀한 넷플릭스 덕에 새삼 이 장르의 본질을 환기할 기회가 생겼다는 데 있다. K막장드라마는 한국 사회 여성의 현실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다. 막장드라마라는 용어의 기원이 드라마 <조강지처 클럽>에서 출발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외도, 무능 등 가부장의 결함으로 인한 가정의 파국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는 막장드라마는 가부장제에 갇힌 기혼여성들의 한을 대변하고 마침내 그들에게 새로운 대안적 가정을 선물하는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 말하자면 막장드라마는 여성의 억압된 현실을 반영하는 잔혹 스릴러인 동시에 가부장제로 안전하게 회귀시키는 퇴행적 판타지라는 양가성을 지닌 장르다.

<블랙의 신부>는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결혼의 상품성을 풍자하는 이 드라마는 한국 여성들에게 결혼이란 일종의 ‘생존혼’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혜승은 대학 강의를 할 만큼 전문적인 지식과 능력을 지녔지만, 남편의 죽음 이후 계속해서 생존의 위협에 시달린다. 혜승의 모친은 그녀의 생계를 위해 결혼정보회사 렉스에 가입신청을 하고, 렉스에 입성한 혜승은 그 화려해 보이는 세계의 밑바닥을 목격한다. 최상위 신랑감인 ‘블랙’을 차지하기 위해 여성들이 경쟁하는 가면 파티 장면은 <오징어 게임>의 결혼 서바이벌 버전을 보는 듯하다.

렉스 대표 최유선의 인물 설정도 흥미롭다. 흙수저 출신의 유선은 생존을 위해 아버지뻘 남성과 결혼한 뒤 그의 물적 기반 위에서 뛰어난 경영 실력을 발휘, 렉스를 대한민국 최고의 결혼정보회사로 키워냈다. 그 모든 노력에도, 네 살 차 의붓아들이 집에 돌아온 순간 상속 순위가 밀리게 된다. 유선은 ‘블랙의 신부’ 자리를 쟁취한 여성들이 그 후에도 여전히 불안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보여준다.

하지만 드라마의 의의는 딱 여기까지다. <블랙의 신부>는 급작스러운 결혼식 결말을 통해 애써 풍자극을 표방했던 기획 의도를 단숨에 뒤엎는다. 이제는 시대가 달라졌다. 미혼여성에게 결혼은 더는 필수 조건이 아니며, 기혼여성에게도 이혼은 하나의 선택지일 수 있다. 이 같은 탈혼의 시대에 <블랙의 신부>가 보여준 씁쓸한 뒷맛은 막장드라마가 재생산하던 결혼의 이데올로기가 이제 유효기간이 다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김선영 TV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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