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 막아준 든든한 '무기', 폭포비 그날밤 '흉기'로 돌변했다

신성식, 어환희 2022. 8. 12. 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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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 오전 서울 관악구 신림동의 주택가엔 폭우로 인해 주민들이 내놓은 침수 쓰레기가 골목마다 쌓여 있다. 어환희 기자

11일 오전 서울 관악구 신림동의 주택가. 집집이길 앞에 침수 쓰레기를 내놨다. 반지하 주택 중 침수되지 않은 데가 없었다. A(25)씨네 반지하 주택에 들어가니 거의 천장까지 물이 들이친 흔적이 보였다. 벽지가 다 찢어졌고, 블라인드도 흙투성이다. 가재도구는 폭격을 맞은 듯 널브러져 있다. 3개의 방, 거실 어디에도 성한 데가 없다.

A씨네 침수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10여년 전에도 물에 잠겼다. 그때는 종아리까지 물이 찼는데도 집안이 쑥대밭이 됐다. 이번에도 그 선에서 끝날 것으로 생각해 일단 네 식구가 밖으로 나왔다. 이불로 계단으로 들어오는 물을 일단 막았다. 뭐라도 챙겨 나오려고 아버지와 함께 집 안으로 들어가려다 포기했다. 수압 때문에 문이 열리지 않았다. 다시 물러났고 삽시간에 물이 거의 천장까지 찼다. A씨는 “그 순간 패닉이 와서 물건을 하나도 못 챙기고 나왔다”고 말한다.

빨리 나오길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끔찍한 일이 벌어졌을 것이다. 문을 열 수 없었고, 유일한 탈출구인 창문으로 나왔어야 한다. 방범창을 뜯지 못했을 수도 있다. 철로 된 방범창은 아주 튼튼해 보였다. A씨는 “어느 날 반지하 주택에 범죄가 잦다고 해서 남들처럼 달았다. 방범창이 침입을 막아줘야 하는데, 손으로 뜯기면 소용없지 않나”라고 말했다. 그는 “평소에는 방범창이 범죄를 막아주지만 수해 때는 비극과 직결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지난 8~9일 폭우로 피해를 입었던 A씨(25·서울 관악구)의 반지하 집 창문에 방범창이 설치돼 있다. 어환희 기자

11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북아현동 주택가는 인기척을 찾기 힘들 정도로 고요했다. 영화 기생충의 모티브가 된 동네이다. 일부 집에서 TV 소리가 흘러나왔다. 가파른 골목을 오르내리면서 30여채의 반지하 주택을 살폈더니 방범창이 없는 반지하 주택이 없었다. 몇 곳의 방범창을 흔들어보니 꿈쩍도 하지 않았다. 철이나 알루미늄으로 만든 거라서 쇠톱 같은 게 없으면 자를 방법이 없었다. 물이 흘러들지 못하게 창밖에 물막이판을 설치한 데도 거의 없었다.

평소 방범창은 각종 범죄를 막아주는 순기능을 한다. 창살이 촘촘하고 튼튼하다. 그런데 이게 8~9일 집중호우 때는 ‘흉기’로 돌변했다. 서울 관악구 신림동에서 참변을 당한 장애인 일가족은 수압 때문에 방문을 열 수 없었다. 창문으로 나오려고 했지만, 방범창을 제거하지 못했다.

반면 서울 동작구 성대시장 인근 주택가 골목의 반지하 주택 80대 부부는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졌다. 물이 차서 문이 안 열렸고, 금속제 방범창을 뜯을 수 없었다. “살려 달라”고 외쳤고, 1층 집주인 여성이 방범창을 뜯으려 했지만 실패했다. 다행히 2층의 60대 남성이 나서 뜯었다.

그렇다고 수해 때문에 방범창을 없앨 수는 없는 일이다. 공하성 우석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범죄 위험이 있어서 방범창 자체를 없애는 건 현실적 대안이 아니다”라며 “옛날식 방범창은 고정형이라 안에서 열기 힘들다. 요즘에는 안에서 열 수 있게 여닫이식 잠금장치를 단 현대식 방범창이 있는데, 이것으로 교체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경기연구원은 2020년 ‘반지하의 거주환경 개선방안’ 보고서에서 “반지하 주택 진입부에 차폐문을 설치하고 건물밖에 빗물유입 방지시설(물막이판 등)을 설치할 필요가 있다”며 “반지하 주택 밀집지역에 배수처리장·빗물펌프장 등을 증설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공 교수는 “반지하에서는 무릎 정도만 물이 차더라도 대피하기 어렵다. 왜냐면 계단으로 내려오는 물살이 생각보다 세다. 그래서 발목까지 물이 찼다 싶으면 대피해야 한다”고 말했다. 공 교수는 “반지하의 안팎의 물 높이가 같아지면 수압이 같아져 문이 열린다. 문이 안 열린다고 당황하지 말고 좀 더 기다리면 된다”고 말했다.

공 교수는 “구청에서 물막이판을 지원해야 한다. 물이 잘 빠지게 평소 배수구의 이물질 청소를 잘 해두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신성식·어환희 기자 sssh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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