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틱] 현실감
[크리틱]
김영준 | 전 열린책들 편집이사
어렸을 때 유일한 오락거리는 티브이(TV)였다. 내가 원하는 프로그램을 보는 데 별 제한이 있지는 않았는데, 예외가 있었다. 일요일 저녁 권투 중계는 아버지가 반드시 봐야 하는 것으로, 절대 양보해주지 않았다. 이상한 것은, 나로서는 지루할 뿐이었던 권투 중계를 아버지 옆에 앉아서 매주 꾸역꾸역 봤다는 사실이다. 아마 티브이를 안 보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아버지는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가끔씩 +1, -1 등을 종이에 쓰고는, 한 라운드가 끝날 때마다 양쪽의 점수를 기록하는 것이었다. 시합이 케이오(KO)로 끝나지 않으면 점수를 합산해서 판정 결과를 기다렸다. 적중률은 그저 그랬다. 모든 라운드에서 아버지가 우세하다고 적어놓은 선수가 판정패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아버지가 전문가가 아닌 건 명백했다. 걸핏하면 판정에 분노하는 관중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마지막에야 채점 결과를 공개하는 이 스포츠는 확실히 관중의 승복을 많이 요구하는 편이었다.
모든 대결의 원형인 권투가 선명함을 포기한 것은 아이러니다. 권투의 역사는 수천년을 헤아리지만, 3분이라는 라운드 시간과 15라는 라운드 횟수가 정해진 지는 150년쯤밖에 되지 않는다. 그때부터 한쪽이 쓰러지거나 항복하지 않고도 경기가 끝날 수 있게 됐다. 이런 변화를 추진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으리라는 건 짐작이 되는 바다. 모든 스포츠가 그렇듯 권투 역시 현실 세계에서 존재하기 힘든 선명함을 대리 충족해주는 역할이 기대됐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권투는 끝장승부 대신 점수를 기록하는 쪽으로, 즉 선수의 목숨을 보호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거기에 잘못된 것은 별로 없다. 권투 얘기는 이 정도로 마치자.
결과 예측에는 신통치 않았던 아버지의 점수 기록은 이렇게 이해가 된다. 첫째는 점수든 횟수든 뭔가를 세면서 보는 건 몰입도를 높이는 좋은 관전법이라는 것. 사실 스포츠뿐 아니라 영화나 음악을 접할 때도 그렇다. 둘째는 ‘아! 맞았네’ ‘때렸네’ 하면서 흥분 자극에 몰두하기보다는 이를 감점과 가점으로 재빨리 환원하는 조작이 감정의 평온을 유지하는 연습이 된다는 것. 셋째는 자신이 매긴 점수를 전문가의 판정과 맞춰봄으로써 자신의 주관성을 깨닫고 현실감을 재조정할 수 있다는 것. 의식했든 안 했든 매주 권투 중계를 보는 건 아버지로서는 규칙적으로 정신의 비타민을 복용하는 것과 비슷했을 것이다.
살아갈수록 현실감은 어떤 충격적인 깨달음의 결과라기보다는 하나하나 노력해서 얻고 유지하는 것에 가깝다고 느끼게 된다. 나는 아버지가 링 위에서 쓰러진 선수를 보면서 현실감을 충전한 순간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쓰러진 선수도 마찬가지다.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쓰러진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그건 승리 못지않게 비현실적인 경험이며, 엄청난 치욕이지만 세상 이목의 중심이 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 순간은 현실감이 돌아오는 최적의 여건은 못 된다.
얼마 전 “지지율에 신경 쓰지 않는다”는 대통령 발언이 보도됐다. 좋게 해석하고 싶지만, 그 말이 성적이 떨어졌다고 걱정하는 교사 앞에서 학생이 “저는 성적에 신경 안 써요”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린 건 사실이다. 여기서 성적은 “현실”이다. 현실을 무시하는 학생이 점수를 올릴 수 있을까. 한방에 점수 올리는 비책을 궁리할지 모르지만, 교사라면 그런 방식에 회의적일 것이다. 그동안 점수를 잃었던 순간들을 돌이켜보며 1점씩 회복해나가는 편이 낫지 않을까. 지지율을 매주 현실감 체크라고 생각하며 말이다. 결국 대통령실은 며칠 전 “신경 쓰지 않는다”는 말을 거둬들였다. 애초에 그 말은 지지율이 천장을 뚫을 기세일 때 “자만하지 않겠다”는 뜻으로나 할 말이지 반대인 경우에 쓸 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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