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장하드를 잃고 나는 쓰네

한겨레 2022. 8. 11.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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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자신의 외장하드에 뭐가 들어 있는지 아는가? 정확히 모른다면 컴퓨터에 연결해 들여다보면 된다.

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다.

나는 그 옆에 앉아 인공두뇌를 복구하러 온 안드로이드처럼 외장하드를 매만졌다.

나는 고장 난 외장하드를 잠시 묻어두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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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창]

게티이미지뱅크

[삶의 창] 이명석 | 문화비평가

당신은 자신의 외장하드에 뭐가 들어 있는지 아는가? 정확히 모른다면 컴퓨터에 연결해 들여다보면 된다. 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다. 내겐 12년 전에 산 320기가, 6년 전에 산 1테라, 그리고 3년 전에 당분간 용량 걱정은 덮어두자며 장만한 4테라짜리 외장하드가 있다. 비극의 패턴이 그렇듯 가장 싱싱하고 커다란 녀석이 날아갔다. 기술적 잔소리는 사양한다. 이제 복구 업체에 거액을 건네는 방법밖에 남지 않았다.

뜨거운 날 서울 용산 나진상가로 들어섰다. 기울어진 천창의 희뿌연 아지랑이 아래 여러 가게에서 내놓은 전자부품들이 내장처럼 늘어져 있었다. 삑삑대는 지게차를 피해 상자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니 영화 <존 말코비치 되기>나 <인셉션>의 무의식 세계로 빠져드는 기분이 들었다. 방향을 잃고 한참을 헤매다가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그동안 노트북이 차면 외장하드로 열심히 옮기기는 했지. 하지만 다시 들여다본 적은 거의 없지 않나? 일단 밖으로 나가 몸을 식히기로 했다.

카페 한쪽엔 로봇 프라모델들이 진열돼 있었다. 나는 그 옆에 앉아 인공두뇌를 복구하러 온 안드로이드처럼 외장하드를 매만졌다. 이 안엔 과연 뭐가 들어 있을까? 정말 되살릴 만한 가치가 있을까? 직업상으로는 내가 써온 글이 가장 중요하다. 하드가 날아갔을 때 심장이 덜컥했고 무조건 되살려야 한다고 여겼던 이유도 거기 있으리라. 하지만 몇번의 뼈아픈 경험으로 글은 클라우드에 저장해두고 있다. 업무 서류들은 이메일로 주고받았으니 거길 뒤지면 되겠다. 모아둔 영화나 음악은 아깝지만 어떻게든 다시 구할 수 있다. 그러나 다음의 것들은 사라졌다. 몇년간의 사진, 영상, 녹음, 내 삶의 기록들.

나에겐 몇장의 흑백사진이 있다. 어릴 적 외사촌 누나가 데리고 다니며 찍어줬다고 한다. 덕분에 기억도 못 하는 순간들이 인생의 보물이 됐다. 나도 누나 나이가 되자 카메라를 장만했고, 여행을 다니며 내 삶의 가장 중요한 장면들을 필름으로 남겼다. 디지털 시대로 넘어가자 디에스엘아르(DSLR), 캠코더가 내 손에 들어왔고, 곧이어 영화도 찍을 수 있다는 고성능 스마트폰을 얻었다. 점점 더 선명한 기록들이 점점 더 빠르게 하드를 채우고 있다. 하지만 내가 그것들을 돌아보는 일은 점점 더 줄어들고 있다.

카페 창가 화사한 원피스를 입은 여성이 긴 손톱으로 스마트폰을 빠르게 스크롤하고 있었다. 가끔 일행에게 화면을 보여주며 허락받는 걸 보니, 오늘 찍은 사진을 골라 에스엔에스(SNS)에 올리려나 보다. 나도 어떨 땐 하루에 수백장 사진을 찍고 그중 몇장을 골라 올린다. 에스엔에스는 몇년 뒤 ‘과거의 오늘’이라며 그 사진을 보여준다. 그래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나? 내 삶의 가장 중요한 장면은 거기 올라가 있잖아. 용량이 훨씬 줄어든 상태라는 게 아쉽지만, 그 역시 기억의 휘발성과 닮았달까?

사실 나는 언젠가부터 열심히 찍지 않는다. 어느 공연장에서의 일 때문인 것 같다. 연주 막바지에 촬영해도 좋다는 안내가 나오자, 관객들이 일제히 앞으로 몰리며 스마트폰과 카메라를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변변찮은 폰을 들고 있던 나는 기세에 밀려 뒤로 물러났다. 그때 이런 야비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 나는 내 눈과 귀로 이 순간을 기록해야지. 그리고 이 기억을 보조해줄 영상은 누군가 대신 찍어줄 거야.

나는 고장 난 외장하드를 잠시 묻어두기로 했다. 언젠가 꼭 필요한 게 들어 있다는 사실을 알면 그때 살려보자. 어쩌면 30년쯤 뒤, 세상이 지겨워질 때 타임캡슐처럼 열어보는 것도 재미있겠다. 그리고 이제 욕심쟁이 다람쥐처럼 먹지도 못할 도토리를 모아두기에 급급했던 자신을 돌아볼 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당분간은 스마트폰이 아니라 눈으로 기록하는 연습을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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